오스트리아 출신 패션‧액세서리 수집가

에블린 오르트너가 1988년 건립

 

중세의 클라라 빈민수도원 있던

자리로 옮겨 2011년 다시 문 열어

 

상설전시관은 여성의 눈으로 본

문화사와 일상사 관련 유물 전시

 

메라노여성박물관에 전시된 19세기 여성들의 의복과 속옷, 일상용품.
메라노여성박물관에 전시된 19세기 여성들의 의복과 속옷, 일상용품.

세계의 여성박물관을 찾아나서는 다소 무모하고 야심찬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전까지 이탈리아 메라노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메라노가 천혜의 자연을 기반으로 하는 관광도시이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파가 있다는 것 그리고 병약한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가 쉬어 갔고, 수많은 예술가들이 다녀갔다는 것을 이곳에 와서야 알았다. 현재 국제여성박물관협회(IAWM) 본부가 이곳에 있다. 메라노 여성박물관의 특징을 표현하자면? 세계 여성박물관 네트워크의 중심! 작지만 강한 여성박물관! 여성의 연대 속에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박물관이다.

작지만 강한 여성박물관

메라노여성박물관에 오기 전에 밀라노에 얼마간 머물렀다. 왜냐하면 올해 제24회 국제박물관협의회(ICOM) 총회(7월 3~7월 9일)는 밀라노에서 열렸고, 3년마다 열리는 총회의 여러 세션에 국제여성박물관협회 워크숍(7월 6일)이 포함돼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곳이었다. ‘여성과 젠더 관련 박물관의 가이드라인’을 주제로 한 워크숍에서는 그리스, 덴마크, 스페인, 스위스, 이탈리아 등 다양한 국가에서 참석한 여성박물관 관계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필자는 워크숍에서 한국의 여성사박물관 건립을 위해 방안을 모색하는 여러 주도그룹의 노력을 포함해 여성가족부 등 정부의 다각적인 지원을 소개할 수 있었다. 워크숍은 여성박물관 운동의 국제 연대를 위한 행사이기도 하지만 여성박물관 설립에 앞서 공유할 만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기 때문에 그것을 잠깐 짚어보고 메라노여성박물관을 이야기해도 좋을 것 같다.

특히 메라노여성박물관은 세계여성박물관 네트워크의 허브로, ICOM과 긴밀하게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첫 순서로 메리트 입센 덴마크여성박물관 관장이 기조연설을 했고, 그 안에서 중요한 가이드라인이 제시됐다. 일종의 비전이면서 목표다. 이를 마중물로 삼아 워크숍에서 토론이 이어지고, 토론 결과는 ICOM 총회에 전달된다. 나중에 IAWM 회원 기관에 공시되는 절차를 밟는다. 9대 가이드라인은 아래와 같다.

 

(1)역사와 문화 속 여성들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젠더 이슈를 다루는 정책들에 대한 지원

(2)여성‧젠더 박물관 건립 촉진

(3)소수자들의 사회적 진입, 젠더 민감성, 다양성에 대한 정치적 입장 채택

(4)타 박물관의 젠더적 시각 촉진

(5)여성들의 유형-무형의 역사문화 유산을 수집, 보존, 연구, 소통, 전시

(6)세계 역사문화의 다양한 시각에 대한 홍보

(7)젠더관련 이슈에 관한 전문연구 진작

(8)지역, 국가, 국제적 박물관 네트워크의 적극적 파트너

(9)목표, 개발전략, 관객참여 박물관과 관련된 분명한 비전과 미션에 기초할 것

 

 

메라노여성박물관 기획전시관에 선보인 여성박물관 관련 자료.
메라노여성박물관 기획전시관에 선보인 여성박물관 관련 자료.

 

메라노여성박물관은 매년 다양한 책을 출간하고 전시한다. 특히 『여성:박물관(Womens: Museum)』은 2010∼2011년 메라노여성박물관 주최의 국제회의 출간물로 여성사박물관에 관한 주요 이론서로 평가할 만하다.
메라노여성박물관은 매년 다양한 책을 출간하고 전시한다. 특히 『여성:박물관(Women's: Museum)』은 2010∼2011년 메라노여성박물관 주최의 국제회의 출간물로 여성사박물관에 관한 주요 이론서로 평가할 만하다.

이런 가이드라인은 여성‧젠더박물관이 단지 생물학적 여성이나 남성을 대상으로 하는 제한적 박물관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인간으로 자존감을 누리며 누구에게나 행복한 세상을 여는 박물관이 돼야 한다는 의미다.

2004년 총회가 서울에서 열린 적이 있어 ICOM 총회는 한국에도 낯설지 않다. 올해는 박물관의 최고 권위체인 ICOM 기구의 아시아태평양지역연합(ASPAC) 위원장에 한양대 배기동 교수가 선출됐을 뿐만 아니라 철박물관 장인경 관장이 ICOM 집행위원으로 다시 임명돼 세계박물관 네트워크에서 한국의 역량이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밀라노총회에선 강원도 영월국제박물관포럼(9월 29~10월 2일) 관련 홍보자료를 볼 수 있었고, 한국을 알리는 별도의 박물관 관련 부스가 마련되진 않았지만 여러 세션마다 한국의 박물관 관련자들이 발표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서구 중심의 전형적 박물관에서 탈피해 대안을 만들어내는 박물관, 다양한 사고와 창의성이 넘치는 박물관 그리고 과거 역사를 통해 미래의 전망을 여는 박물관이 한국에서도 많이 건립되기를 희망하면서 드디어 메라노로 이동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소녀교육’ 수녀원이 박물관으로

그런데 앞으로 메라노여성박물관을 방문할 여행자들을 위해 미리 당부 한마디를 해보기로 하자. “마음을 가볍게 할 것!”

왜냐하면 기차를 몇 번 갈아타야 하기에 느긋한 마음가짐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게다가 저 멀리에 알프스 산맥이 펼쳐지고, 메라노 자체도 해발 3300m가 넘는 높이의 파시리야 계곡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밀라노 중앙역에서 오후 3시25분발 기차를 타고 2시간 남짓 가면 베로나에 도착하고, 다시 2시간 남짓 볼자노로, 그 다음에 1시간 정도 더 가면 메라노. 그러면 밤 8시14분에 메라노에 도착한다. 유럽의 기차 노선은 편리하게 잘 짜여 있기 때문에 갈아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시라! 물론 이 믿음이 여실히 깨지기도 하는 것을 잊지는 마시라!

메라노는 20개주 가운데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같이하는 이탈리아 최고 북단에 위치한 트렌티노-알토아디제주에 속한다. 이 지역은 1918년까지 오스트로-헝가리제국에 속했으나 그 후에 이탈리아에 통합됐다. 그 때문에 인구의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독일어를 사용하며, 모든 행정 문서는 이탈리아어와 독일어를 병기한다. 길가에 서서 귀를 쫑긋 세우고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 이탈리어와 독일어를 함께 들을 수 있다. 그러고 보면 기차역에 메라노(Merano-이탈리아어)와 메란(Meran-독일어)을 병기하고, 행정구역이 이탈리아어로 트렌티노-알토아디제(Trentino-Alto Adige), 독일어로 트렌티노-쥐트티롤(Trentino-Südtirol)이라고 병기하는 이유를 알게 된다. 인구 4만 명 정도의 메라노는 아디제 강 상류와 남 티롤에 위치한다. 주민 대부분이 이중언어를 자유롭게 하고, 어찌 보면 국적은 별 의미가 없이 그저 아디제강과 티롤 산악지방의 사람들의 나라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메라노여성박물관은 1988년 오스트리아의 패션‧액세서리 수집가 에블린 오르트너(1944∼1997년)가 건립한 박물관이 모체다. 메라노여성박물관의 전임 관장이자 IAWM 코디네이터 오스트리드 쉔베거와 지그리드 프레더는 최초의 여성박물관 건물을 보여줬다. 지금의 박물관 위치에서 위로 한 블록 떨어진 마인하드스트라세 2번지 2층 건물에서 시작한 박물관은 1993년 이후 ‘여성박물관-시대를 넘어서는 여성들’이라는 긴 이름을 가진 여성박물관협회가 운영했다. 그러다가 2010년 이곳으로 이전해 이듬해 문을 열었다.

지금의 건물은 중세 수도원이 있던 자리다. 오스트리드 쉔베거는 이곳으로 여성박물관을 이전한 이유에 대해 묻자 “하나는 역사성이고 다른 하나는 재정 문제”라고 말했다. 현재의 여성박물관은 원래 1309년에 유페미아(Euphemia) 대공녀가 건립한 클라라 빈민수도원 건물이다. 수도원에는 성 니콜라스교회를 비롯해 수녀원이 포함돼 있었는데 클라라 성녀를 기리는 빈민수도원과 수녀원은 지역의 길드를 위한 센터 역할을 했으며, 소녀들의 교육을 담당하기도 했다. 중세에 여성교육의 장소인 수녀원을 현대적 여성박물관으로 변모시킨다는 것은 역사성을 보존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는 것이다.

1782년 요세프 2세가 모든 수도원을 폐쇄한 후 이 건물의 소유주가 여러 번 바뀌면서 수도원 모습은 아파트 형태로 변모했다. 하지만 현재 메라노여성박물관 입구 1층 왼편으로는 예전의 수도원 모습에 관한 그림과 설명, 성서를 주제로 한 성화, 십자가 등이 전시돼 옛 수녀원 건물의 자취가 보존돼 있다. 1988년에 최초로 마인하드스트라세 2번지에 자리 잡은 여성박물관은 임대료가 계속 인상돼 이전이 불가피했고, 시 정부와 협의를 거치면서 지금의 박물관에 자리 잡았다. 2004년에 대대적인 재건축을 했고, 2011년부터 메라노여성박물관은 이곳 3층 건물 중 2∼3층을 쓰고 있다.

현재의 메라노여성박물관은 메라노 시정부가 임대료를 지원하는 방식이다. 박물관 운영은 후원금, 입장료, 전시임대료 등을 토대로 하고 있다. 관장과 자료관 사서가 상근직이고, 이 지역 시민과 학생들로 구성된 다양한 자원봉사자로 운영된다.

 

메라노여성박물관 기획전시관.
메라노여성박물관 기획전시관.

 

메라노여성박물관 입구 1층에 있는 수녀원 유물.
메라노여성박물관 입구 1층에 있는 수녀원 유물.

 

제24차 ICOM 밀라노 총회의 여성박물관워크숍에 참석한 각국 발표자들과 함께. 맨오른쪽이 필자.
제24차 ICOM 밀라노 총회의 여성박물관워크숍에 참석한 각국 발표자들과 함께. 맨오른쪽이 필자.

‘젠더·인종·계급’ 토론지원 사업도

이곳의 상설전시관은 여성의 시각으로 본 문화사와 일상사에 집중해 유물이 전시돼 있다. 메라노여성박물관은 에블린 오르트너와 함께 발전했기 때문에 그에 대해 잠깐 언급해 보자. 오스트리아의 중산층 출신의 그는 24살의 나이인 1968년부터 메라노로 이사하면서 이곳과 인연을 맺었다. 그는 친인척 여성들의 영향을 받았는데, 옛날 의복에 관심이 많았던 할머니 그리고 모자를 만드는 이모의 영향을 받아 특히 자신만의 미적인 취향을 만들었다. 17살부터 여성의 의상과 다양한 종류의 여성 액세서리를 수집했던 그는 1988년 메라노에 최초의 여성박물관을 개관했다.

그의 절대적인 헌신으로 풍부한 컬렉션을 바탕으로 한 전시회가 이어졌고, 1994년에 2세기에 걸친 여성사를 재현해내는 대대적인 전시회를 하면서 지역사회에서 인정받는 안정적 박물관으로 발돋움했다. 1997년 에블린 오르트너가 암에 걸려 사망한 후 잠시 에블린 오르트너 여성박물관으로 이름이 바뀌기도 했다.

메라노여성박물관은 여성들의 의상과 패션, 문화와 예술, 근대사와 현대사, 사회학과 정치학 등 여러 측면에 관심을 가진다. 여성의 현안은 기획전시관을 통해 전시하고 있으며 ‘젠더·인종·계급’에 관한 다양한 토론지원 사업을 펼치고 있다. 이 박물관은 여성의 특별하고 민감한 감수성을 사소하고 개인적인 것으로 치부하기보다는 여성, 나아가 인간 고유의 특성의 하나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다양한 전시와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두드러진 특징을 보인다.

필자가 세계의 여성박물관을 탐방하는 작업 도중 특히 메라노여성박물관의 오스트리드 쉔베거의 도움이 컸다. IAWM 조직망을 통해 박물관장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세부적인 정보를 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여성박물관의 국제 연대를 모토로 하는 메라노여성박물관은 남 티롤 산맥에 위치하는 작은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세계와 연결하는 여성박물관의 모델을 보여준다.

각지의 여성박물관들이 처한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함께 해결 방안을 모색해온 메라노여성박물관을 방문하고, 다음 탐방지 보르고여성박물관으로 이동하는 기차 안에서 특히 ICOM과 IAWM의 가이드라인을 곰곰이 생각할 기회를 가졌다. ICOM은 “오늘날 박물관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현대사회의 문화, 사회, 경제 이슈의 중심에 있다”고 하면서 “박물관들은 사회, 정치, 생태 환경에 관한 고유한 도전에 직면해야 하며, 미래세대를 위해 과거의 증인이자 인류 보고(treasures)의 보호자 역할을 하면서 교육 및 민주화를 통한 개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박물관이 어떤 형태의 것이든 어떤 콘텐츠를 담고 있든 온전히 사회와 함께 가야 한다는 것, 해당사회의 고유한 도전에 심각하게 직면해야 한다는 것, 미래세대를 염두에 두고 과거를 지켜내야 한다는 것으로 필자는 이해한다. 한국에 건립될 국립여성사박물관은 ICOM과 세계여성박물관의 목표와 비전을 충분히 공유하면서, 한국의 고유한 색깔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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