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예종·홍익대 미대·고려대...‘성폭력·여성혐오 말하기’흐름 확산

재학생·졸업생이 문제 해결 위해 비대위 결성

‘학내 성폭력 피해자 네트워크’ 마련 움직임도

“개별 가해자 응징보다 구조적·제도적 차원의 변화로 나아가야”

 

고려대 여학생위원회는 지난달 31일 이 학교 정경관대 후문에 대자보를 붙여 학교에 성폭력 사건을 올바르게 해결하고 재발방지 대책을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고려대 여학생위원회
고려대 여학생위원회는 지난달 31일 이 학교 정경관대 후문에 대자보를 붙여 학교에 성폭력 사건을 올바르게 해결하고 재발방지 대책을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고려대 여학생위원회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피해를 입은 자는 아랑곳없이 성범죄자의 미래를 걱정해주는 고려대학교는 여전히 여기에 있다.”

지난달 31일, 고려대학교 정경관대 후문에 대자보가 붙었다. 한 학내 성폭력 사건 해결 과정에서 가해자는 ‘솜방망이 처벌’을 받았고, 피해자는 광범위한 2차 가해를 당했다는 내용의 고발문이었다. 이를 공개한 고려대 여학생위원회는 “피해자보다 성범죄자에게 훨씬 더 친절한 고려대학교 사회는 돌아온 성범죄자를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이는 성범죄를 저지른 학생/후배의 장래를 걱정하여 탄원서를 써주었던 교수/선배들이 고려대학교 안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여학생위원회는 “고려대학교는 단 한 번이라도 학내 성폭력 사건을 제대로 해결한 적이 있는가? 학내 성폭력 사건을 ‘개인’의 문제가 아닌 ‘공동체’의 문제로 인지하고 있는가?”라고 물으며 학교 측의 사과와 해당 사건 전면 재검토를 촉구했다. 

최근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예술과 재학생·졸업생 200여 명은 ‘조형예술과 성폭력 문제 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했다. 학내 성폭력·성차별 고발이 잇따르자 학생과 졸업 동문이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피해자들과 연대해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나선 것이다. 이들은 지난달 31일 입장문을 통해 “제기된 가해 혐의에 대한 교수진의 구체적인 해명과 사과가 우선되어야 할 것이며, 학생과의 협의를 바탕으로 해결방안과 후속 조치를 마련”하라고 요구했다.

SNS를 중심으로 문화예술계 내 성폭력 폭로가 이어지면서, 대학가에서도 학내에 만연한 성폭력·여성혐오 문제를 고발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현직 교수·강사, 교직원, 학생회 간부까지 성폭력의 가해자·방조자로 지목되면서 대학 사회는 또 한 번 충격에 휩싸였다. 

 

최근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예술과 재학생·졸업생 200여 명은 ‘조형예술과 성폭력 문제 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지난달 31일 학교에 적극적인 사태 해결을 촉구하는 입장문을 냈다.
최근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예술과 재학생·졸업생 200여 명은 ‘조형예술과 성폭력 문제 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지난달 31일 학교에 적극적인 사태 해결을 촉구하는 입장문을 냈다.

한예종에선 지난달 중순부터 학부별로 ‘한예종 OO원 내 여성혐오 아카이빙’ 트위터 계정이 만들어지면서 학내 성폭력 사건과 여성혐오적 언사에 대한 제보가 빗발쳤다. 교수·강사들이 학생들에게 심각한 수위의 여성혐오·성희롱 발언을 일삼았다는 증언도 많았다. “여학생들은 술자리에 나오면 가산점을 주겠다” “한국에서 여자가 영화하려면 그런 일(성폭행)이 얼마나 많은데, 그거 하나 못 참으면 연출 못 한다” “육감적이지도 않고 얼굴도 못생긴 게 그림까지 못 그리면 어디다 쓰냐” “여자들이 애를 잘 낳으려면 봉산탈춤을 배워야 한다. 임신 안 할 거면 수업 들을 필요 없다” “여자는 남자가 잠자리를 잘하면 모든 화가 풀린다” “우리 과는 여자가 많아서 선후배 간 단합이 안 된다” 등이었다. 학내 성폭력 사건 해결 과정에서 학내 양성평등상담소와 교수진이 “학교의 명예에 누를 끼치지 말라”며 피해자를 협박하고 사건을 축소·왜곡하는 등 2차 가해를 했다는 증언도 있었다. 파문이 일자 각 학부의 교수진은 사과문을 발표하고, 제기된 학내 성폭력 사건 해결과 재발 방지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홍익대학교 미술대 내에서도 트위터. 페이스북 등 SNS를 통해 학내 성폭력·여성혐오 피해 사례를 공론화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이 과정에서 미술대 학생회장이 다른 미술대 학생과 동의 없이 성관계를 맺은 사실을 인정해, 탄핵안이 발의됐다. 이채림 홍익대 미술대 부학생회장은 지난달 29일 입장문을 통해 “반성폭력의 기조를 추구하던 미술대학 학생회에서 이런 사건이 발생한 것에 대해 정말 깊은 유감을 표한다”며 “피해자에게 2차 가해가 발생하지 않고 피해자가 더 이상 상처를 받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하여 해결해가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편집자주: 2017년 8월 22일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인권위원회는 “당시 학내 성폭력상담소에서는 해당 사건을 성폭력으로 결론내어 사건화하지 않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본 후 사건을 종결하는 것으로 결론내렸다. 탄핵 발의안의 경우에도 부결되어 해임되지 않고 임기를 마쳤다”고 알려왔습니다.)

대학가의 ‘성폭력 말하기’ 흐름이 학내에 만연한 성폭력·여성혐오 문화를 근절할 동력이 되기 위해서는 구조적·제도적 대응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고려대 여학생위원회는 이러한 취지에서 ‘학내 성폭력 피해자 네트워크’를 마련할 계획이다. 여학생위원회는 “학내 성폭력 사건은 가해 사실에 대한 문제 제기와 처벌이 쉽게 일어나지 않음을 알기에 가능한 일”이라며 “가해자들은 사건의 크고 작음을 따져 본인의 가해를 축소하고, 잊어버리고, 합리화시키려 한다. 그러나 우리는 모여서 함께 대응하고 경험을 가시화할 것이고, 그들의 가해는 처벌되는 일임을 알려줄 것”이라고 설명했다. 

모 대학 양성평등상담센터 센터장은 “침묵하던 여성들이 입을 연 것만으로도 긍정적인 변화다. 이러한 움직임이 총여학생회나 여학생위원회 설치·위상 강화처럼, 대학 내 여성들의 집단적·제도적인 발언권과 의사결정 참여권을 확보하는 형태로 나아간다면 더욱 긍정적인 변화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또 “만성적인 예산·인력 부족에 시달리는 학내 양성평등상담소의 권한 확대와 제도 개선도 시급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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