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아르헨티나 페미니즘 연대체 ‘Ni Una Menos’..."국경 없는 연대로 세상 뒤흔들자" 

끝없는 페미사이드·여성혐오에 분노해 거리에 선 여성들

1년 넘게 대규모 시위·캠페인 지속...국제 연대·여론 형성해

낙태 합법화 등 한국의 페미니즘 운동에도 지지·연대 밝혀

“여성으로 산다는 건 ‘2등 시민’이 되는 일...함께 연대해 바꿔나가자”

 

 

지난 10월 19일(현지 시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열린 ‘검은 수요일(Miercoles Negro)’ 시위 모습. ⓒNi Una Menos 제공
지난 10월 19일(현지 시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열린 ‘검은 수요일(Miercoles Negro)’ 시위 모습. ⓒNi Una Menos 제공

여성들의 분노가 라틴아메리카를 뒤흔들고 있다. 뿌리 깊은 젠더폭력과 여성혐오에 맞서, 대륙 전체로 뻗어 나가는 역사적 시위의 도화선은 아르헨티나다. 아르헨티나 여성들은 페미사이드(여성살해·femicide)와 여성혐오를 근절하기 위해 1년이 넘도록 시위와 캠페인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6월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선 20만 명이 거리행진을 했다. 이들은 남성에게 살해당한 여성들을 추모하며 “Ni Una Menos(단 한 명도 잃을 수 없다)”라고 외쳤다. 올해 6월에도 전국적인 시위가 열렸으며, 지난 20일(현지 시간)엔 사상 첫 대형 파업 시위가 벌어졌다. (▶관련 기사 : “우리는 살고 싶다” 아르헨티나 여성들의 ‘검은 수요일’ 파업 시위)

그 중심에 페미니즘 연대체인 ‘Ni Una Menos’가 있다. 언론인, 예술인, 정치인, 학자, 여성운동가 등 다양한 이들이 지난해 결성한 단체다. 이들은 SNS 해시태그 캠페인 등을 통해 전 세계의 여성들과 연대하고 국제 여론을 형성하는 한편, 아르헨티나 정부에 효과적인 젠더폭력 근절책을 마련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Ni Una Menos’의 창립 멤버이자 교수, 작가인 세실리아 팔메이로(Cecilia Palmeiro)는 여성신문과의 서면 인터뷰에서 “아르헨티나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건 ‘2등 시민’이 되는 일”이라고 말했다.

“여성은 아르헨티나의 절반이지만, 여러 억압을 받고 있습니다. 여성은 남성과 같은 일을 해도 임금은 27%나 적게 받죠. 여성 실업률은 10.5%로 남성(8.5%)보다 높아요. 여성폭력 문제는 말할 것도 없이 심각하죠. 그런데 현 정부는 여성 관련 공공복지 예산을 삭감했고, 혐오범죄로부터 여성을 보호하는 프로그램 다수를 폐지했습니다. 일자리 없는 가난한 여성들이 가장 타격을 받았죠. 경제적 자립이 어려우니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에게서 벗어나질 못하는 겁니다. 현대적 피임법과 성교육도 아직 부재합니다.” 

 

 

지난 10월 19일(현지 시간) 아르헨티나 전역에서 ‘검은 수요일(Miercoles Negro)’ 시위가 열렸다.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만 검은 옷을 입은 여성 수천 명이 사상 첫 파업 시위에 나섰다. 이날 멕시코, 볼리비아, 엘 살바도르, 우루과이, 칠레, 파라과이에서도 연대 시위가 열렸다. ⓒNi Una Menos 제공
지난 10월 19일(현지 시간) 아르헨티나 전역에서 ‘검은 수요일(Miercoles Negro)’ 시위가 열렸다.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만 검은 옷을 입은 여성 수천 명이 사상 첫 파업 시위에 나섰다. 이날 멕시코, 볼리비아, 엘 살바도르, 우루과이, 칠레, 파라과이에서도 연대 시위가 열렸다. ⓒNi Una Menos 제공

아르헨티나는 특유의 ‘마치스모(machismo·남성우월주의)’ 문화와 가톨릭 전통이 뿌리내린 나라다. 20세기 후반 등장한 권위주의 우파 정권은 전통적인 어머니·아내의 정체성을 ‘이상적 여성상’으로 부각시키고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낮게 유지했다. 심각한 경제 위기 속에서 아르헨티나 대중은 봉기해 정권 교체를 이뤘다. 젊은 층과 여성 노동자·실업자들을 중심으로 한 페미니즘 운동도 활발히 전개됐다. 2003년 페론주의(복지를 강조하는 국가사회주의)자인 네스토르 키르치네르가 대통령이 됐고, 2007년 말 좌파 성향이며 키르치네르의 부인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가 첫 여성 선출직 대통령이 되면서 여성계의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경기 침체와 부정부패 의혹이 잇따랐고, 유권자들은 12년간 이어진 좌파정권에 등을 돌렸다. 지난해 말 CEO 출신이자 중도우파 성향의 마우리시오 마크리 대통령이 집권하며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이 시작됐다. 정부가 가스·전기 등 에너지 보조금을 삭감하면서 올해 상반기 가스·전기 요금은 평균 400% 수준으로 급상승했다. 연간 30%대던 인플레이션은 40%대로 치솟았다. 불경기가 더욱 심해지면서 실업 문제가 사회 문제로 떠오른 상황에서, 정부의 공공부문 인력 대규모 해고는 거센 반발을 불렀다. 아르헨티나 노동계는 지난 4월 35만명이 참여한 항의시위를 열었고, 이달 중 24시간 대규모 총파업을 예고한 바 있다. 

남성우월주의·가톨릭 전통 뿌리내린 아르헨티나

잇따른 정치적·경제적 위기 속에서 여성 현안은 뒷전

페미사이드 처벌 강화해도 끔찍한 젠더폭력 계속돼

임신중절 합법화 요구 거세지만 반대 목소리도 완강

“한국 페미니스트들 지지”...내년 글로벌 연대 시위도 제안

이 과정에서 “여성 현안은 뒷전으로 밀려났고, 수많은 여성의 삶은 폭력의 위협으로 그늘졌다.” 지난 23일 관광도시 멘도사에선 30대 남성이 전 애인의 집을 찾아가 이 여성과 여성의 이모, 할머니를 살해했다. 이달 초엔 16세 소녀가 관광도시인 마르 델 플라타에서 남성들에게 끌려가 강제 마약 투약, 성폭행과 고문 끝에 숨졌다. 지난해 4월엔 중부 도시 코르도바의 유치원에서 수업 중이던 교사가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전남편에게 살해당했다. 한 14세 소녀는 임신했다는 이유로 남자친구에게 맞아 목숨을 잃었다. 

2012년 아르헨티나 정부는 가정폭력·명예살인 등 ‘페미사이드(여성살해·femicide)’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법을 제정했다. 그러나 효과는 미미해 보인다. 아르헨티나 대법원에 따르면 지난해 젠더 폭력으로 인해 발생한 살해사건은 총 286건이며, 그중 20세 미만의 여성이 피해자인 경우가 18%였다. “통계에 따르면 30시간마다 여성 한 명이 살해당하는데, 이번 달엔 그 주기가 24시간으로 줄었다”고 팔메이로는 말했다. 

최근 한국에서 다시 일고 있는 ‘낙태 비범죄화’ 운동은 아르헨티나에서도 뜨거운 이슈다. 한국처럼 아르헨티나도 현행법상 ‘낙태죄’에 따라 원칙적으로 임신중절을 금한다. 단 산모의 생명이나 건강이 위험할 경우, 성폭행을 당해 원치 않는 임신을 한 경우는 예외다. 휴먼라이츠워치(2009)에 따르면 아르헨티나에선 매년 50만 건의 임신중절 시술이 이뤄진다. 위험한 불법 임신 중절 시술로 인한 산모 사망률은 전체의 30%에 달한다. 많은 아르헨티나 여성들이 임신중절이나 자연유산(miscarriage)을 했다는 이유로 징역형을 받았다.

2005년과 2013년 아르헨티나에선 전국적인 낙태권 운동이 벌어졌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를 비롯한 근본주의·보수주의 세력은 출산·육아를 중심으로 한 여성의 전통적 역할을 강조하면서 임신중절 합법화 논의에 제동을 걸었다. 이들은 저출산 문제와 경제 성장을 거론하며 정부와 여성들을 압박하고 있다. 

 

‘검은 수요일’ 시위에 참여한 여성이 ‘비바스노스케레모스(Vivas Nos Queremos·우리는 살고 싶다)’라고 적힌 두건을 착용하고 서 있다. ⓒNi Una Menos 제공
‘검은 수요일’ 시위에 참여한 여성이 ‘비바스노스케레모스(Vivas Nos Queremos·우리는 살고 싶다)’라고 적힌 두건을 착용하고 서 있다. ⓒNi Una Menos 제공

페미니즘은 아르헨티나의 심각한 젠더폭력·차별 문제를 다시 거리로 끌어냈다. 오늘날 아르헨티나 여성들은 가장 개인적인 문제를 가장 정치적인 문제로, 가정에 머물렀던 여성의 역할을 적극적 정치 행위자로 확장시키고 있다. 아르헨티나 여성들이 처한 폭력적이고 비합리적인 상황이 전 세계에 알려졌고, 세계 각지의 여성·페미니즘·LGBT·인권단체와 개인의 지지·연대도 잇따르고 있다. Ni Una Menos는 정부에 여성의 낙태권 확보, 국가여성위원회 예산 증액, 각급 교육기관에서의 통합적 성교육과 성평등 교육 시행, 젠더폭력 피해자에 대한 실질적 법적 구제 절차 마련, 생계가 어려워 폭력 신고를 하지 못하는 여성들에 대한 경제적 지원 등을 요구하고 있다.  

아르헨티나 여성들은 한국의 상황에도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며,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에게 연대와 지지의 말을 전했다. 내년 6월 3일께에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가 함께 여성 해방 시위를 열자는 제안도 했다. 

“임신중절을 여성의 권리로 여기지 않고, 임신중절을 선택한 여성들을 처벌하는 것은 잔인무도한(outrageous)하며 더는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대한민국의 자매들이여, 계속 싸워나갑시다. 우리 함께 단결하고, 서로 돕고 지지하면서 남성우월주의에 맞섭시다. 전 세계 어디에서나 억압과 그에 대한 저항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페미니스트 혁명을 일으키는 중입니다. 함께라면, 우리는 세상을 뒤흔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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