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덩이 만지고 도망가는 성범죄에 무차별 욕설까지

길거리서 여성들이 겪는 ‘괴롭힘’

인터넷에 ‘엉만튀·슴만튀 후기’

성범죄가 무용담? “사소한 문제 아냐”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지난 21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연 ‘길거리 괴롭힘·성폭력·성희롱 말하기대회’에서 토론자들이 길거리 괴롭힘 피해를 경험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은 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지난 21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연 ‘길거리 괴롭힘·성폭력·성희롱 말하기대회’에서 토론자들이 길거리 괴롭힘 피해를 경험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은 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길거리를 걷다 누군가 갑자기 엉덩이를 움켜쥐고 간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유유히 사라진다. 이는 ‘엉만튀’(엉덩이 만지고 도망가기)라 불리는 길거리 괴롭힘으로, 여성들이 길거리나 지하철 등 공공장소에서 겪는 성추행이다. 분명한 성범죄인데도 한국사회에선 ‘별 것 아닌 일’로 여겨지며 일부 남성들은 놀이로 소비해 문제가 되고 있다.

“주황색 꽃무늬 스키니진을 입고 나간 날이었다.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는데 누군가 내 엉덩이 한쪽을 움켜쥐고 갔다.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당혹스럽다가 세상이 무서웠다가 ‘내가 이걸 입고 나온 게 화근이었구나’라는 자책감까지 들었다. 범인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주위를 둘러봤지만 저 멀리 등산복을 입은 중년의 아저씨만 걸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과 똑같았다. 마치 가해자는 애초부터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9월 21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연 ‘길거리 괴롭힘·성폭력·성희롱 말하기대회’에서 ‘안성댁’이라는 필명을 쓰는 한 여성은 길거리괴롭힘을 당한 경험을 이같이 토로했다.

그는 지하철에서 ‘엉만튀’(엉덩이 만지고 도망가기)를 당한 후로 “가급적 ‘덜 튀는 색’ 혹은 ‘몸을 최대한 가리는’ 옷을 사게 됐다. 왜 내가 내 몸을 지키기 위해 긴장하고 조심해야 하는지,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 사이에서 잠재적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중 옷가게에 들러 쇼핑이나 할까 생각하며 지하철 2호선에서 5호선으로 갈아타러 가는 길이었다. 어떤 남자가 갑자기 손으로 막으며 ‘저기요’하고 나를 멈춰 세웠다. 그러더니 기분 나쁜듯한 표정으로 날 노려보기 시작했다. 당황스러워 ‘네?’하고 되물었다. 그 남자는 계속 노려보더니 입모양으로 ‘XX’이라고 한 후 돌아갔다.” (고용·필명)

여성들이 길거리에서 겪는 괴롭힘에는 성추행·성희롱 외에도 욕설 같은 언어폭력이 있다. 고용씨는 자신이 지하철에서 겪은 괴롭힘을 이야기하며 그때 느낀 두려움과 당황스러움을 털어놨다. 또 사건의 심각성을 외면하는 경찰의 태도, 낯선 이에게 괴롭힘을 당해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데 대해 답답함을 토로했다. 일방적으로 폭력을 당했는데도 “내가 치마를 입고 있어서 그랬나?” “딱 붙는 상의를 입고 있어서? 혹시 눈화장을 해서?”라며 자신에게서 이유를 찾아 검열하게 되는 현실에 대해 울분을 표하기도 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지난 21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연 ‘길거리 괴롭힘·성폭력·성희롱 말하기대회’에는 70여명의 여성들이 참여해 열띤 분위기 속에서 토론을 벌였다.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지난 21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연 ‘길거리 괴롭힘·성폭력·성희롱 말하기대회’에는 70여명의 여성들이 참여해 열띤 분위기 속에서 토론을 벌였다. ⓒ한국성폭력상담소

‘길거리 괴롭힘·성폭력·성희롱 말하기대회’에서 피해 여성 6명은 자신의 경험을 들려줬고 토론자와 관객들은 지지 발언을 하며 성폭력 문제 해결을 촉구했다. 이번 집담회는 성폭력·성희롱뿐 아니라 그동안 사소하게 여겨져 온 길거리 괴롭힘도 다뤄 여성들이 일상에서 겪는 무차별 폭력을 이야기했다. 길거리 괴롭힘은 여성이나 성소수자, 혹은 사회적 약자라는 이유로 공공장소에서 낯선 사람에 의해 겪는 물리적·언어적·성적 괴롭힘을 말한다.

토론 진행자로 나선 이진송(『연애하지 않을 자유』 저자)씨는 길거리에서 일어나는 성범죄가 별것 아닌 일로 여겨지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꼬집었다. 그는 “엄연한 성추행에 왜 ‘엉만튀·슴만튀’(가슴 만지고 도망가기)처럼 놀이 이름이 붙는지 모르겠다”며 “성범죄자가 계획적으로 저지르는 성폭력이 엔터테인먼트화되어 거대한 놀이문화로 소비되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남성들은 실제 여성을 성추행한 뒤 인터넷 커뮤니티에 ‘엉만튀·슴만튀 후기’라고 제목을 붙여 성범죄를 무용담처럼 늘어놓는다.

이씨는 “‘아이스께끼’(여성의 치마를 들어 올리는 것)나 ‘새총’(브래지어 끈을 잡아당기는 것)도 엄연한 성추행인데 귀여운 이름을 붙여 ‘사소한 일’로 여기게 만든다”며 “그런 사회현상이 더 이상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씨는 특히 “‘아이스께끼’는 오랫동안 남자아이들의 짓궂은 장난이라 여겨져 왔는데, 이는 성범죄를 왜곡시키는 문제를 낳는다"며 “아이들이 저지르는 성추행을 어리다는 이유로 방관하지 말아야 한다”고 꼬집었다.

『이기적 섹스』의 저자 은하선(은하선토이즈 대표)씨는 “여성들은 성추행을 당해도 가해자가 처벌받는 경험을 거의 갖지 못한다”며 “가해자를 신고하더라도 증거 확보와 피해 사실 입증이 어려워 사건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아 ‘내가 신고해도 달라지는 건 없구나’라는 무력감을 얻게 된다”고 말했다.

은씨는 자신이 당한 길거리 괴롭힘도 들려줬다. “지하철에서 어떤 남자가 내 옆으로 와 ‘XX, 내 말 안 들려?’라며 시비를 거는 경우도 있고, 애인이랑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뭐야, 레즈비언이야?’라고 물어보는 경우도 있었다”며 길거리나 공공장소에서 행해지는 무차별적인 괴롭힘을 이야기했다.

싱어송라이터 신승은씨는 “야외 공연을 하면 ‘야, 목젖 없는데? 야, 가슴…’이라고 하는 등 내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내기하는 소리가 들린다”며 일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는 언어폭력을 토로했다. 토론자들은 여성에게 행해지는 폭력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이자 혐오라고 입을 모았다.

방이슬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가해자가 여성이나 사회적 약자에게 성범죄를 저지르거나 괴롭힘을 가하더라도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라며 괴롭힘이나 폭력이 사소한 문제로 여겨지고 처벌받지 못하는 현실을 꼬집었다. 관객들은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에서 자신이 겪은 길거리 괴롭힘이나 성추행을 이야기하며 우리 사회에 여전히 여성에게 행해지는 괴롭힘이 만연해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지난해부터 길거리 괴롭힘을 공론화하고 괴롭힘에 대한 대처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넌(Non)진상-길거리 괴롭힘 소멸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휘파람을 분다거나 엉덩이를 만지고 도망가는 것도 성폭력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라며 “작은 행위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큰 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소장은 특히 “‘괴물’이라 불리는 강간범은 갑자기 생겨나는 게 아니다”며 “우리 사회가 길거리 괴롭힘을 눈감아주면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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