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제퍼슨의 독립선언서 “모든 남성은 평등하게 창조”에 반기

티파티 사교 모임서 우연히 시작… 개혁파 여성 5명 여권회의 조직

 

1848년 7월 19일 미국 뉴욕시 북서쪽 세네카 폴즈 웨즐리교회서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튼 초안 ‘권리와 취지를 위한 선언서’ 발표

 

여성 참정권 비롯해 11개항 결의 72년간의 여권투쟁 서막 열려

국민의 절반에 해당하는 인구의 시민권 주장하는 신호탄을 쏘다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튼(왼쪽)과 그의 영원한 동지였던 수전 B 앤서니.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튼(왼쪽)과 그의 영원한 동지였던 수전 B 앤서니.

“모든 남자와 여자는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자명한 진리로 주장하는 바이다.”

1848년 7월 19일 미국 뉴욕주 북서쪽에 위치한 세네카 폴즈의 웨즐리교회에서 32세의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튼은 교회를 가득 메운 대중 앞에서 선언문을 낭독했다. 스탠튼은 토마스 제퍼슨이 미국독립선언서에서 모든 남성(men)은 평등하게 창조됐다고 쓴 표현에 의문을 제기하며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도 평등하게 창조됐음을 선언했다. 여성의 종속적 상황과 법적, 사회적, 정치적 억압에 대한 공식적 항의를 제기한 것이다. 오래된 관습과 사고방식에 대한 도전을 선포하는 나팔소리가 울려 퍼졌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세인트 폴즈에 뿌려진 작은 씨앗

스탠튼이 선언문을 낭독한 곳은 1848년 7월 19일과 20일 이틀간 열린 여성의 권리를 논의하는 회의장이었다. 이 회의는 제인 헌트가 친구들과 함께 차를 마시고 담소를 나누려고 초대한 사교 모임에서 우연하게 발의됐다. 세네카 폴즈 근처 워터루에 사는 제인 헌트는 1848년 7월 9일 오번에 사는 친구인 마사 코핀 라이트, 동생 마사를 방문 중인 노예제 폐지론자이자 탁월한 연설가로 유명한 루크레티아 모트, 워터루에 사는 또 다른 친구인 매리 앤 맥클린톡과 세네카 폴즈에 사는 스탠튼을 티파티에 초대했다.

그들은 가족과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해 수다를 떨다 여성에 대한 불공평함에 대한 토론을 했고, 스탠튼은 그동안 축적된 불만을 격노하며 쏟아냈다. 헌트의 가족전승에 의하면 제인의 남편 리처드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어 왜 무엇인가 하지 않느냐고 의문을 제기했고 그 순간 5명의 여성들은 대중 동원력이 있는 루크레티아가 그 지역에 있을 때 여성에 대한 불편부당함을 논의하는 회의를 조직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차 마시는 모임이 여권회의로 발전하게 된 것은 이들 5명이 범상치 않은 인물들인데다 특히 스탠튼이 이미 오래전부터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한 회의를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네카 폴즈 회의를 추진하게 된 계기는 8년전 런던에서 있었던 세계반노예제 회의에서 비롯됐다. 당시 회의에는 남자 대표와 함께 8명의 여성대표들이 초대됐지만 이들이 여자라는 이유로 회의 참석이 거부됐고, 중앙홀에서 떨어진 곳에서 커튼을 친 상태로 회의를 듣기만 해야 했다.

 

미국여성명예의전당은 정부나 기관이 아닌 지역주민들이 주도해 만들었다. 특히 뉴욕주가 아닌 전국의 여성을 대상으로 여성의 권리는 물론 미국역사 발전에 기여한 여성을 위대한 여성으로 헌액하는 곳으로 문을 열었다. ⓒ박현숙
미국여성명예의전당은 정부나 기관이 아닌 지역주민들이 주도해 만들었다. 특히 뉴욕주가 아닌 전국의 여성을 대상으로 여성의 권리는 물론 미국역사 발전에 기여한 여성을 위대한 여성으로 헌액하는 곳으로 문을 열었다. ⓒ박현숙

스탠튼은 회의 대표로 참석한 헨리 스탠튼의 신부로 신혼여행차 그곳에 있었고, 당시의 상황에 분노하며 여성 대표였던 루크레티아와 여성의 권리를 위해 헌신하기로 결의를 다지게 된다. 이 일은 평소 그가 여성으로 겪은 부당함을 표출시키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노예제 폐지론자인 헨리와 결혼했고, 당시 관행에 반해 남편에 대한 복종의 선서를 생략한 채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고, 자신의 처녀적 성을 그대로 쓰기로 했다. 또 이미 어린 나이에 학교에서 아내의 종속성을 묘사한 시 읽기를 거부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여성의 권리를 요구하는 회의를 열기까지 8년의 시간이 지났다. 8년 동안 그는 3명의 남자 아이를 출산했고, 엄마로, 가사 책임자로 분주했다. 보스턴에 살던 스탠튼 가족은 1847년 세네카 폴즈로 이사를 왔고, 엄마의 역할과 가사 관리로 힘든 한해를 보낸 그는 대부분의 여성들이 소외된 가정에서 살아야 하는 실질적인 어려움을 이해했고 여성의 어려움을 개선시키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다른 4명의 대표 중 맥클린톡과 헌트 집안은 미국 퀘이커 자유파로 오랫동안 반노예제 운동에 헌신했다.

세계반노예제 회의 참석 거부당한 여성들

매리 앤 맥클린톡은 반노예제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바자회를 조직한 바 있고, 마사 라이트는 개리슨을 만난 이후 반노예제 운동에 헌신했다. 오번에 있는 라이트의 큰 집은 반노예제 논의의 중심지가 됐으며 지하철도를 이용해 도망가는 노예들의 정거장이 됐다. 개혁 정신이 충만한 5명의 여성은 쉽게 의기투합할 수 있었고, 회의의 조직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회의를 할 공간으로 노예제 폐지운동을 적극 지원한 웨즐리 교회가 예약됐고, 지역신문에 여성의 권리에 관해 논의하기 위해 회의를 소집한다는 공고를 냈다. 다른 몇 개의 신문에도 모임이 보도됐고 그 지역의 대규모 퀘이커 공동체에 널리 알려졌다. 스탠튼과 맥클린톡의 딸인 엘리자베스 맥클린톡은 유명한 개혁가들과 반노예제 활동가들을 초대했다. 그중에는 노예제 폐지운동가로 유명한 새라 그림케와 ‘도망노예’ 출신 노예제 폐지운동가인 프레데릭 더글라스도 포함됐다.

1848년 7월 16일 다섯명이 성명서를 만들기 위해 맥클린톡의 집에서 두 번째 모임을 가졌다. 그들은 스탠튼이 작성한 초안을 호소력 있는 성명서로 바꾸기 위해 다른 선언서와 법령집 등을 검토하다 독립선언서를 모델로 삼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개회선언문에 맞도록 전문을 수정하고 영국왕 조지 3세가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에게 행한 18가지 부당한 일이 기술된 내용을 남성이 여성에게 행한 부당한 행위에 관한 내용으로 바꿨고, 11항의 결의안을 추가했다. 그들은 선언문을 ‘권리와 취지를 위한 선언서’로 명명했다.

 

 

방문객센터 1층 로비에서. 세네카 폴즈 여권회의를 조직한 인사 5명과 유명인사들 그리고 무명씨들의 동상이다. 박주 대구가톨릭대 교수(한국여성사학회장), 필자, 김성은 대구한의대 교수(왼쪽부터)가 동상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방문객센터 1층 로비에서. 세네카 폴즈 여권회의를 조직한 인사 5명과 유명인사들 그리고 무명씨들의 동상이다. 박주 대구가톨릭대 교수(한국여성사학회장), 필자, 김성은 대구한의대 교수(왼쪽부터)가 동상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1848년 7월 19일 1차 회의가 열렸다. 스탠튼은 모여든 청중 앞에서 ‘권리와 취지를 위한 선언서’를 읽어내려갔다. 그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수탈, 여성에 대한 억압적 지배와 여성들이 겪어온 부당함을 열거하면서 이제 이러한 태도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후 세션에서는 11항의 결의안을 낭독해 여성의 삶을 어떻게 향상시킬지 구체적으로 논의했다.

첫날 회의에 관한 입소문이 퍼지면서 둘쨋날은 남자를 포함해 더 많은 군중이 왔다. 인구 4000여명의 작은 타운에 300명이 운집한 것이다. 회의장에서 스탠튼은 ‘권리와 취지를 위한 선언서’를 다시 읽었고 토론을 거쳐 청중은 선언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그러나 11항의 결의안에 대한 표결을 부치는 과정에서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9번째 결의안이 문제가 됐다.

여성참정권 결의 놓고 거센 논란

선언문 작성 시 법적 자문을 해준 남편 헨리도 이 조항을 문제삼으며 스탠튼에게 회의가 익살극이 될 것이라고 우려한 바 있었다. 여권회의에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성의 정치적 권리를 제외한 사회적, 시민적, 종교적 권리만 주장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투표권이 있어야 추가적인 권리를 획득할 수 있고 미래의 입법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믿은 스탠튼은 단호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레데릭 더글라스는 만일 여성에게 참정권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나 역시 참정권을 주장할 수 없을 것이라는 내용의 연설을 했고, 청중은 이 결의안을 포함한 모든 결의안을 지지했다. 68명의 여성들과 32명의 남성들은 각각의 선언문에 자신의 이름을 서명했는데 서명한 사람 대부분은 유명인이 아니었고 부자에서 가난한 사람까지 경제적 지위도 다양했다. 여성참정권이 획득되기까지 72년간의 여권투쟁의 서막이 올려진 것이다.

이 대회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다. 국민의 절반에 해당하는 인구의 시민권을 주장하는 신호탄이었으며, 미래의 모임을 조직할 기폭제가 됐다. 1848년 세네카 폴즈에 뿌려진 씨앗은 이후 전국여성운동으로 성장했는데, 가장 직접적으로는 이 회의에 참석했던 로체스터의 퀘이커 여성들이 2주 후에 로체스터에서 여권회의를 열었다는 점이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