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인들 나라 사랑 모를소냐

우리도 의병하러 나가보세”

‘안사람 의병가’ 지은 의병장

 

여자의병 30여명 조직하고,

자금 모아 의병 지원

아들도 독립군으로 키워

 

여성 의병장 1호 윤희순 영정. ⓒ국가보훈처
여성 의병장 1호 윤희순 영정. ⓒ국가보훈처

우리는 1894년 의병항쟁을 시작으로 1945년 해방이 되는 순간까지 독립을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방법도 다양했다. 무기를 들고 일본에게 전면적으로 맞섰던 의병항쟁이 있는가 하면, 교육을 통해 지혜로운 백성을 길러 강한 나라의 기초를 닦자는 애국계몽운동도 있었다.

또 나라를 지키지 못한 부끄러움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저항한 사람도 있었고, 나라 밖에서는 군인을 길러 일본과 전쟁을 통해 독립을 하고자 했던 무장항일투쟁도 있었다. 침략의 우두머리나 기관을 직접 응징하고자 했던 의열투쟁이 있었고, 국제정세를 활용한 외교적인 노력도 있었다. 우리의 광복이 어느 날 갑자기 강대국에 의해 주어진 게 아니라 독립을 위한 투쟁과 저항을 끈질기게 이어간 결과라는 얘기다. 그리고 그 속에는 분명 여성들의 역할도 있었다.

8월 15일 현재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여성은 모두 286명이다. 전체 독립유공자 1만4564명 가운데 2% 정도니 수적으로는 결코 많지 않다. 그러나 오랜 세월 가사를 돌보는 역할에만 매여 있었고, 기록물 생산이 어려웠던 점을 감안한다면 그 의미는 적지 않다. 여성 독립유공자 286명 가운데 가장 많은 항쟁 분야는 단연 3‧1운동이다. 국내항쟁과 광복군 그리고 학생운동이 뒤를 잇고 있으며, 만주와 미주에서 활약한 여성도 여럿 있다. 이들 가운데 독립운동사의 본격적인 시작이 된 의병항쟁사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여성이 있다. 바로 윤희순(1860~1935), 양방매(1890~1986) 등이 그들이다.

윤희순은 서울에서 태어나 16살에 춘천으로 시집을 갔다. 남편은 유홍석의 장남 유제원이었다. 살림도 넉넉하지 않은 데다 시어머니마저 돌아가신 뒤 오래돼 혼자서 살림을 도맡아야 했다. 윤희순은 결혼 20년만인 36세에 첫 아들을 얻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이듬해 을미년(1895)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거해 일어난 의병이었다.

시아버지 유홍석이 의병을 일으키고 출정에 나서자 윤희순은 자신도 따라가겠다고 떼를 썼다. 남자들은 우국충정으로 의병에 나서는데 부녀들만 집안을 지키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가정을 잘 돌봐달라는 시아버지의 만류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집에 남게 된 윤희순은 시아버지의 무사 귀환을 빌며 정성으로 기도를 드렸다. 여기까지는 ‘효부 열부’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윤희순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의병 지원에 나서기 시작했다.

윤희순이 적극 나서자 처음에는 반대하던 고흥 유씨 일문의 부인들도 차츰 찬동했다. 그녀는 더 많은 사람을 의병대열에 참여시키고자 ‘안사람 의병가(義兵歌)’ ‘의병군가(義兵軍歌)’ ‘병정가(兵丁歌)’ 등을 지어 부르게 했다.

 

윤희순이 지은 의병 가사 중 ‘안사람 의병의 노래’와 ‘경고한다 오랑캐들에게’ 사본. ⓒ국가보훈처
윤희순이 지은 의병 가사 중 ‘안사람 의병의 노래’와 ‘경고한다 오랑캐들에게’ 사본. ⓒ국가보훈처

‘안사람 의병가’에는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 사랑 모를소냐, 아무리 남녀가 유별한들 나라 없이 소용 있나, 우리도 의병하러 나가보세”라는 내용으로 여성들을 독려하였다. 또 ‘왜놈대장 보거라’에는 “우리 임금, 우리 안사람들 괴롭히면 우리 조선 안사람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줄 아느냐, 우리 안사람도 의병을 할 것”이라는 경고를 당당히 담기도 했다.

어린 아들까지 친‧인척에게 맡겨놓고 부녀 의병을 모으는데 발 벗고 나서자 세간에서는 “윤희순이 누구냐”고 묻을 정도였다. 윤희순은 유교적 남녀관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의 문을 활짝 연 선각자였다.

그뒤 1907년 광무황제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으로 의병항쟁이 거세게 일어나자 윤희순은 다시 의병에 나섰다. 그녀는 1908년까지 강원도 춘성군 가정리 여우천 골짜기에서 여자의병 30여 명을 조직하고, 자금을 모아 의병을 지원했다. 이런 노력에도 결국 나라가 무너지자 1911년 4월 윤희순은 만주로 망명했다.

망명 대열에는 고흥 유씨 대소가족 40~50호가 함께했다. 윤희순은 이들을 이끌고 만주에서 궁핍한 생활고를 해결하는데 앞장서고, 부인들의 항일정신을 일깨우고자 ‘안사람 의병노래’를 지어 부르게 했다. 더불어 나라의 독립을 이끌 인재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특히 안으로는 망명 후 시아버지와 남편이 연이어 세상을 떠나자 아들들을 독려해 독립운동을 지원하게 했다. 특히 아들 유돈상은 어엿한 독립군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1935년 일경에게 체포된 유돈상은 만주에서 순국했고, 11일 뒤 윤희순도 76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그녀는 ‘일생록’ 말미에 “매사는 자신이 알아서 흐르는 시대를 따라 옳은 도리가 무엇인가를 생각하여 살아가길 바란다. 충효정신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남겼다.

 

윤희순 의병가사집. ⓒ독립기념관
윤희순 의병가사집. ⓒ독립기념관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넘어 나라가 처한 현실 문제에 직접 뛰어든 윤희순의 올곧은 뜻과 실천은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그 뒤를 이어 여성들은 꾸준히 민족의식을 키우며, 민족을 위해 세운 뜻을 꺾지 않고 항일투쟁에 나섰다.

본격적인 첫 장인 국채보상운동을 시작으로 3·1운동, 의열투쟁, 사회운동,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 지원, 한국광복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펼쳤다. 특히 만주로 망명한 여성들은 인고의 세월을 견디며, 광복의 밑거름이 됐다. 이들은 모두 가정의 울타리를 넘어 민족을 위한 뜻을 세워 그 길을 실천했다.

그러나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여성들의 역사는 많은 부분이 기억 저편에 반쪽으로 남겨져 있다. 기록의 부재로 여전히 많은 여성들의 행보가 묻혀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삶을 찾아 발굴하고 조명하고, 기억해야만 온전한 역사가 될 것이다. 이제 그 몫은 우리의 것이다. 근래에 들어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어 다행스럽기는 하지만, 한층 더 영근 성과가 나오기를 힘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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