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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현실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래서 가끔 소망

한다.

“한달쯤 훌훌털고 여행이나 떠났으면!”

“일년쯤 모든것 잊고 자유롭게 살아봤으면!”

소망하다못해 염치없는 희망도 해본다.

“누가 보너스로 일년쯤 뎅겅, 잘라주지 않으려나”

“어느날 하늘에서 자유 한뭉텅이 뚝, 안 떨어지나?”

아무튼 많은 사람들의 소망이 현실의 구속을 떠나 무언가 ‘실컷 자

유로움’을 열망하는 것.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은 그런 소망들을 다

만 희망사항으로 간직하고 살아간다.

간혹 용감한 사람들이 그 소망을 감행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그들을 보며 “와, 부럽다”라고 탄성도 지르고, “왜 나는

감행하지 못하나?”하고 의기소침해지기도 한다.

“웬지 답답해서 그냥 떠났어”

“서울하늘처럼 가슴속에 스모그가 잔뜩 깔려서 며칠 다녀올께”

그렇게 어이없이 떠난 그들이 다녀와서 한다는 말은 거의 비슷하다.

“떠나고 싶어했던 현실이 내 존재의 뿌리라는 걸 더욱 절실하게 느

꼈어.”

“평소엔 공기처럼 대수롭지 않던 주위사람들이 소중하다는 걸 더욱

깊이 깨달았어.”

어떤 철학교수도 자주 ‘홀로 여행’을 떠난다.

“당신을 그리워하기 위해서 나는 떠난다고.”

그렇다.

사람과 사람사이엔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물론 늘 함께 있어서

생성되는 ‘고색창연한 거리’, 그것의 곰팡향내도 나름대로 필요하

다.

그러나 싱싱한 선도를 유지하기엔 알듯말듯한 신비의 거리, 다가가

지 못할 비장의 섬같은 것 하나쯤은 있어 보이는 거리, 그것이 반드

시 필요하다.

함께 있을 때 느끼지 못했던 절실함, 고마움, 대견함. 이런 감정들이

그 ‘거리’에서 발생하는 에너지, ‘총체적 결과물’이다.

그러기 위해선 가끔씩, 서로를 떠나봐야 한다. 홀로 되어 객관적인

‘나’를 바라보고, 또 그 ‘나’가 멀리있는 ‘너’를 바라봐야 한

다.

얼마전 <카우치 인 뉴욕>이라는 영화를 봤다.

처음엔 주거지를 바꿔 살기로 했다가 인생자체가 바뀌어진 두사람.

미국 뉴욕의 맨해튼. 고층빌딩 사이에 자리한 최고급 아파트.

그곳에 유명한 정신분석 전문의가 살고 있다.

그는 매일 고민을 짊어지고 상담하러 오는 환자들을 상담해주는 현

실에 지쳐있었다. 게다가 파경직전까지 간 약혼자와의 관계가 그를

더욱 우울하게 했다. 생각다 못해 그는 현실타개책으로 신문에 기발

한 광고를 낸다.

‘6주간 아파트를 바꿔살 사람 구함’

프랑스 빠리의 샹젤리제. 낡고 허름한 아파트.

매일같이 쏟아지는 러브레터와 사랑을 호소하는 청년들에게 지겨워

진 매력적인 발레리나가 이 광고를 보고 뉴욕행을 결심한다.

이렇게 해서 삶의 심각함과 어두움에 젖어살던 의사와 파릇파릇한

봄날같은 낭만을 지닌 발레리나의 바꿔 살기가 시작된다.

두사람은 서로에게서 자신들이 가지지 못한 매력을 발견하게 되고,

불평불만으로 지내던 현실의 소중함도 더불어 깨닫게 된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나는 생각했다.

우리도 영화처럼 그렇게 한달쯤 ‘통째로’ 바꿔살 수는 없을까?

자신의 짜증스러운 현실을 다시 재점검해 볼 여유도 생기고, 객관적

인 시각도 가질 수 있을텐데.

그래서 현실을 좀 더 열심히 살게 되지 않을까?

모든 것 다, 그대로 놔두고 ‘사람’만 옮겨 사는 방법.

설사 실천까지는 못하더라도 상상만이라도 해보자. 그 순간만이라도

즐겁지 않겠는가.

자, 그렇담 나는 누구랑 바꿔 산담?

내가 평소 이루지 못한 것을 과감하게 실행하며 살아가는 여러가지

유형들을 머리속에 떠올려 본다.

집시처럼 오지여행?

피카소처럼 그림그리기?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처럼 영화감독?

만델라처럼 인권운동하다가 감옥행?

…어쨌거나 상상은 자유다.

내 능력이 미치지 못해도 내 맘대로 종횡무진.

속도와 길이에 전혀 제한이 없다.

그것이 상상의 매력.

현실이 짜증스럽다고 얼굴 찡그리는 사람들에게 나는 적극 권하고

싶다. 누군가와 한달쯤 바꿔 살아보라고. 비록 상상속에서나마!

순간의 상상이 하루를 행복하게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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