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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오나 가나 각기 그들의 신념을 열변으로 토해내는 선동가들

의 장황한 연설을 들어야 하는 날인가!

민홍은 우수양의 뜨거운 웅변을 듣고 앉아 있는 자신이 처량하게

느껴졌다. 적어도 아무런 주장도 그리고 열정도 없는 무지렁이 월급

장이에 지나지 않는 그녀의 무력한 위치를 새삼 절감할 수 밖에 없

었다. 그와 같은 어정쩡한 삶의 자리를 두고 어떤 소설가는 ‘회색

지대’라고 표현했다던가. 민홍은 쓴 입맛을 다시며 우수양이 폭포

처럼 내쏟는 결의는 물론 사회 개혁을 위한 투쟁의 변을 경청해야

만 했다. 친구의 열변은 계속되었다.

지배층 또는 지도자로 자처하는 인간의 독선과 오류는 오직 의식이

깨어있는 소수 선각자 내지는 개혁자들의 지속적인 저항에 의해서만

척결될 수 있다는 것. 비록 그리스도인은 아니지만 적어도 창조주

가 인간들에게 요구하는 삶이란 ‘공의(公議)를 행하며 인자(仁慈)

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구약성경중 미가서 6

장 5절)정도의 수준이라는 것은 알고 있노라며 우수양은 민홍의 동

조를 구했다. 민홍은 옳은 얘기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밤샘 회의 등으로 갈라터진 친구의 입술에 핏물이 맺혀 있었다.

민홍은 다른 삶의 목적과 신념때문에 이미 엇갈린 길을 걷고 있는

친구에 대한 아쉬움에 가슴이 더 아팠다. 그러나 그들이 추구해야

할 목적과 삶이 그들의 운명처럼 다를 수밖에 없음을 민홍은 또한

수긍해야 했다. 다만 그들은 불가항력적인 절대자의 부름 내지는 숙

명의 부름에 따라서 사는 존재이기에 더욱 그러할지도 몰랐다. 그

러나 모든 일에는 그에 맞는 적당한 시기가 있지 않던가.

“우수양, 때가 때인만큼 노조 결성 움직임은 너무 위험하지 않을

까?”

“물론 너처럼 얘기하는 사람들도 많아. 그렇지만 많은 동료들이 열

악한 근로환경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 현실앞에서 잘난 나랏님에게

만 손가락질 하면서 시간과 정력을 허비할 수는 없잖아? 어느 누군

가가 작은 일일망정 사람다운 삶을 위해서 싸워야 한다는 당위성만

이 우리 아니 적어도 내 행동을 정당화시켜주고 있을 따름이야. 물

론 투쟁의 결과를 낙관할 수는 없겠지만….”

“만일 누군가 치뤄야할 댓가를 다른 누구 아닌 네가 치뤄야 한다

면?”

“나도 희생은 싫어. 하지만 상황이 내 희생을 요구한다면 감수해야

지겠지.”

민홍은 그녀의 선한 얼굴과 작은 몸 어디에서 그처럼 질긴 투쟁의

지가 솟아나오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결코 평탄한 것 같지는 않은

가정 환경에 대한 자의식이 그녀의 투지에 불을 당기는 인화제(引

火製) 역할을 하는 것인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청바지차림에다

늘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친구의 푸석푸석하게 부은 얼굴이

안쓰러워서 민홍은 친구의 거친 손을 꼬옥 쥐어 주었다. 무엇이 과

연 그녀로 하여금 한갓 평범한 인간이기를 거부하도록 부추기는가?

그렇다면 나는 과연 평범한 존재인가? 그것 마저도 확신할 수 없자

민홍은 깊은 혼돈에 빠져 들었다. 순간 피부 각질이 들뜨고 일어난

우수양의 얼굴위에 겹치는 고운 얼굴이 있었다.

윤미희의 매끄럽고 고혹적인 얼굴이었다. 예상했던대로 윤미희는 ○

방송국의 인기 아나운서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미희는 지금도

강한성과 데이트하며 결혼여부를 저울질하고 있을까. 민홍은 불쑥

튀어 나온 강한성이라는 남자의 존재에 놀라며 공의(公議)를 놓고

고뇌하는 우수양에게 가책을 느꼈다.

“민홍아, 그만 가봐야겠어. 내가 연락책임을 맡았거든, 지금 벌써

세시야.”

“한마디만 더 할게. 사실 우리 말瑛?근무환경에 문제가 있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어. 그러나 모순점을 개선하기 위한 절차에 있어

서 보다 유연성있게 어떤 단계를 밟아 나가는 게 더 효과적이지 않

을까. 그러니까 경영진과 대화할 수 있는 채널을 먼저 만들어서 건

의사항을 제시해볼 수도 있겠고….”

“소위 말하는 평화적인 대화란 이상일뿐 실질적인 타개책은 아냐.

이는 이미 다른 회사를 통해서 여러번 증명이 되었으니까. 인권과

평등을 위한 진보란 세계 어느 곳에서나 유혈의 댓가를 치룬 뒤에

야 이뤄졌음을 너도 잘 알겠지? 나는 자신을 혁명 투사라하고 착각

하진 않아. 우리 의사를 네게 강요할 생각도 없고.”

“우수양, 하나만 더 물을께. 넌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지?”

일어서던 우수양은 엉거주춤 자리에 되앉았다. 예기치 않은 질문에

난감한 기색이었다. 입술을 깨물며 그녀는 깊은 생각에 잠기는 듯

보였다. 행여 우수양은 고교시절 학교 당국의 자판기 운영에 관한

비리를 꼬집는 대자보를 교내에 붙였다가 정학처분을 당할 뻔 했던

돌발 사건을 되돌아 보는 것일까. 그날 민홍은 반장이 아닌 단짝으

로서 우수양의 집을 찾아가서 진심을 털어 놓았다.

“넌 특정인에게 자판기 운영권을 넘긴 댓가로 학교측이 뇌물을 받

아 챙긴다는 소문의 진위(眞僞)를 확인한 뒤에 대자보를 썼니? 만일

소문만을 믿고 이를 익명으로 써서 붙였다면 이는 적의 등에 총을

들이대는 치사한 서부극의 총잡이의 행동과 다를 바 없잖을까?”

그날 자신을 찾아 온 친구를 허름한 대문앞에 세워두고 얘기했던

그녀는 다음 날로 학교측에 반성문을 제출했고 어떻든 무사히 고교

를 졸업했다. 순간 무언가를 결심한 듯 우수양이 결연한 눈빛으로

친구를 보았다.

“넌 설마 지금 당장 네 질문에 대답해주기를 기대하는 건 아니겠

지?”

사사로운 문제에 관한 한 침묵했던 우수양의 눈에서 번들거리는 물

기를 발견한 민홍은 곧바로 사랑의 다짐을 받은 듯한 감격에 콧날이

시큰했다. 그러나 우정을 확인한 기쁨은 곧바로 깊은 상실감으로 대

체되었다. 영원한 이별앞에서 그들이 새삼스레 옛정을 되새기는 듯

한 서글픈 예감 탓이었다. 우수양은 자리에서 일어선 즉시 공중전

화 부스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감시의 눈초리를 의식한 듯 그녀는

뒷문을 통해서 곧바로 다방을 빠져 나갔다. 가슴 한 구석이 무너진

듯 허전했기에 溯?그대로 앉아 있던 민홍은 뒤이어 불안감이 엄습

하자 계산대로 향했다. 찻값을 지불한 그녀는 다방을 나섰다. 지하다

방의 계단이 오늘 유독 힘겹고 가파르게 느껴졌다.

‘아! 언제였더라. 오늘 처럼 혼독 속에서 휘청이며 계단을 뛰쳐 올

랐던 것은.’

생후 처음 키웠던 사랑과 결혼에 대한 예감이 난도질당했던 졸업식

을 마친지 열흘가량이 지난 이월말이었다. 로부터

합격통보를 받은 직후 민홍은 인사과에 입사 서류를 제출한 뒤 인

근에 있는 고층빌딩의 지하다방을 찾았다. 뜨거운 커피로 꽃샘 추위

에 얼어붙은 몸을 덥힐 양이었다. 무심코 커피를 마시던 그녀가 거

의 충동적으로 강한성에게 전화를 걸었던 이유는 그 다방이 그의 회

사 옆에 위치해 있었던 까닭이었다. 그러나 과히 극적인 그의 변심

의 변을 확인하고 싶은 치기만만한 욕구도 통화욕을 부추겼을 것이

다. 당시 그들은 너댓번 넘게 만났던 터였고 그 사이 그가 사랑을

고백했을 뿐만 아니라 졸업직전에는 유럽 출장중 그녀에게 전화로

청혼까지 했던터라 그같은 만남을 백지로 돌리기가 조금은 아쉽게

느껴졌던 게 민홍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헌데 그는 정작 졸업식장

에서 깨끗이 종적을 감췄던 사연에 대해서 그 뒤 해명을 하기는 커

녕 그녀에게 연락조차 끊어 버렸던 것이다. 인간관계의 상식을 파기

했던 것이다.

강한성은 전화를 받은 뒤 이십여분이 지나서야 나타났다. 객적은

미소를 입가에 흘리며 그는 졸업식날은 정말 미안하게 되었노라고

어설프게 사과했다. 외국에서 바이어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오

는 통에 콩튀듯 팥뒤듯 바삐 뛰었노라고 궁색하게 변명하면서. 민

홍은 그녀를 향해 타오르던 열정의 불꽃이 스러진 그의 냉랭한 눈빛

과 안색을 바라보자 그가 일방적으로 연출하고 출연했던 열정에 대

한 모노드라마가 막이 내렸음을 간파했다. 몸에서 힘이 빠져 나가는

가 싶더니 민홍 역시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시들해지며 우습게 보이

기까지 했다. 그에 대한 관심마저 상실한 그녀는 그와 마주 앉아 있

는 시간마저 아까웠다.

그녀는 커피 값을 낸 즉시 다방을 나섰다. 바로 그녀를 뒤따라 나

왔던 듯 계단을 오르는 그녀 등뒤에서 남자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

다. 강한성이었다.

“이봐요, 얘기할 게 있으니까 바쁜 사람을 불러 냈을 것 아냐?”

“선배님은 이미 표정과 몇 마디 얘기로 모든 얘綬?다 해 주셨잖

아요?”

그는 침을 뱉듯 “거짓말장이!”라고 내뱉었다. “가정환경까지도

철저히 속인 주제에 감히 날 찾을 엄두를 냈던가”, 그녀를 조소했

다.

“제가 선배님을 속였다구요?”

그녀는 그가 자신의 집안에 대해 뒷조사했음을 깨달은 순간 전신이

떨렸다.

“정…녕. 제 가정환경을 알고 싶으셨다면 좀 더 정확히 그 일

을…”

그러나 민홍은 다음 말을 잇지 못한 채 포수의 총에 맞은 짐승처럼

헐떡이면서 바로 이 계단을 뛰어 올랐다. 가진 자의 냉철한 계산과

주판질에 치를 떨면서.

‘우물’을 나선 민홍은 편집국앞 승강기에서 내렸다. 직원들이 복

도 게시판 앞에서 수런대고 있었다.

어머! 공고문을 올려다 보던 그녀는 신음을 토해 내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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