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에도 ‘마음’이 있었다
법에도 ‘마음’이 있었다
  •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 승인 2016.05.28 11:22
  • 수정 2016-05-28 11: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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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피해자에게 예의를 갖춰야 함에도 돈을 뜯으려 했다는 등 엉터리 주장을 하고….”

지난 19일 있었던 한 강제추행 사건의 선고공판에서 재판장이 피고인에게 한 말이다. 피고인은 회식을 마치고 귀갓길에 방향이 같은 두 여직원과 함께 택시를 타고 갈 것을 제안(요구)했고, 그 중 한 사람이 먼저 내리자 남은 여직원에게 성추행을 한 혐의로 재판 중이었다. 피해자는 계약직이었고, 피고인은 피해자의 직속상관이었다. 피고인은 수사‧재판과정에서 시종일관 범행을 부인하며 당시 많이 취한 상태여서 기억이 잘 안나지만 자신은 결코 추행할 사람이 아니며, 평소 가족에게도 소개할 정도로 피해자와 친한 사이였다고 항변했다.

헌법 27조 4항의 “형사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는 원칙에 의해 재판부는 이 사건의 피고인처럼 범행을 전면부인하는 경우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유죄 입증을 위해서는 명확한 증거가 요구되지만 대부분의 성폭력 사건은 그 특성 상 증인이나 증거가 없다. 다행히 이 사건은 목격자로 택시기사가 있었고 피해자는 추행이 시작되자 기지를 발휘해 휴대폰으로 동영상을 촬영, 증거로 제출했다. 그럼에도 작년 4월에 발생해 1년이 넘게 끌어온 이 사건은 공판 과정에서도 피고인 측과 피해자 측의 날선 공방이 오갔다.

결국 재판부는 다음 세 가지 이유로 유죄를 판결했다. 첫째, 피고인이 추행 사실을 전면부인하고 동영상에도 추행 장면이 찍힌 것은 아니지만 추행하는 듯한 음성이 있고, 내릴 때 피해자가 택시기사에게 뒷좌석 왼쪽 문을 열어달라고 요청했던 점, 바로 가족들에게 이 사건을 이야기한 점 등을 보면 허위진술로 볼 이유가 없다. 둘째, 피해자가 그 자리에서 반항하거나 택시기사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못한 것은 피고인이 직장상사였고, 전혀 예상할 수 없이 갑자기 끌어안았을 때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셋째, 이 사건으로 인한 피해자의 스트레스 장애 여부는 치료 내용이 상당히 많고 최근까지 지속되었다는 점에서 인정된다.

그날 법정에서 재판장의 유죄판결 이유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나는 법에도 ‘마음’이 있음에 안도했다. 그동안 성폭력의 판단은 얼마나 심한 폭행과 협박이 있었는지, 죽을 힘을 다해 저항했는지를 입증해야 하는 최협의설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실제 상담 현장에서 보면 ‘법의 객관성’이라는 이름으로 사건 발생 이전의 피고인과 피해자의 관계, 피해 후 피해자의 태도, 구조요청 여부, 신속한 고소 여부, 피해자의 과거 품행 등을 캐물으며 오히려 피해자를 의심하는 듯한 수사·재판과정으로 2차 피해가 발생한다. 용기내어 고소해도 성폭력 사건의 기소율이 50.1%(검찰청, 2015)에 머물고 있음이 이를 방증한다.

이번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는 두 차례나 법정에 출석해 피고인 측 변호인으로부터 “왜 즉시 구조 요청을 안했느냐” 등의 소위 ‘객관성’에 기반한 집요한 질문들을 받았지만, 의연하고 진정성 있게 당시 상황을 진술했다. 재판장은 이러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하고 피고인에게 “설혹 본인은 그 행위가 성추행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더라도 재판 과정에서 얼마나 피해자가 스트레스를 겪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음에도” 진심어린 사과를 안한 태도를 질타했다. 이런 재판부라면 피해자들의 신고율도 높아질 것이고, 공판 과정에 참여해 진술하는 것도 고역이 아니라 오히려 치유의 과정이 될 것이라는 희망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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