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 매출 1조7000억원
세계 시장을 제패하다
“글로벌 기업 된 비결이요?
우수한 여성 인재 덕 봤죠”
80년대부터 동일노동 동일임금
“남녀 임금 차별 안 될 말”
스물일곱살에 창업한 성기학(68) 영원무역 회장은 아웃도어 한 우물만 파서 종업원 7만명에 연 매출 2조원의 글로벌 전문기업으로 키운 자수성가형 CEO다. 영원무역은 특히 남녀 임금을 차별하지 않는 여성친화기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서울 중구 만리동 영원무역 수출영업본부에 있는 성 회장 집무실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단출한 공간에 회의용 탁자, 지구본, 화이트보드 등이 놓여 있었다. 직접 만난 성 회장도 그의 공간과 이미지가 비슷했다. 짙은 사투리에 꾸미지 않는 말이 소탈했다. 칠순에 가깝지만 현역답게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내가 원래 공장 짓는 일이 전문인데 요즘은 CEO 일보다 제품 개발에 관심이 많아요. 그래서 견본옷도 여러 벌 갖다놨어요.” 성 회장은 집무실 한켠에 옷들이 걸린 행거를 가리키며 이같이 말했다.
“여성 잠재력을 회사에 도움 되는 쪽으로 사용”
성 회장은 지난달 전문직여성 한국연맹(회장 유영선)이 주최한 ‘2016 국제친선의 밤’ 행사에서 양성평등과 여성 일자리 창출에 기여한 공로로 ‘BPW 골드 어워드’를 받았다. 역대 BPW 골드 어워드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대표이사,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등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성 회장은 “사실 특별히 여성 우대를 찬성하거나 주장한 적은 없다. 일 잘하는 사람을 뽑고 대우해준 것일 뿐”이라며 “여성의 잠재력을 회사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사용했다. 12억불 수출도 여성 임원들이 주도적으로 해나갔다. 자연히 성별 임금 격차도 안 두게 되더라”고 말했다. “1980년대부터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을 지켜왔다니 꽤나 앞서갔다”고 하자 그는 경남 창녕에서 자란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줬다.
“선친(성재경, 81년 작고)께서 대규모로 양파 재배와 종자 사업을 하셨는데 일꾼들을 공경하는 걸 보고 자랐어요. 나도 열서너살 때부터 양파 농장에서 수십명씩 일꾼을 데리고 일했어요. 양파씨를 선별해 포장해 시장에 출하하고, 일꾼들에게 아버지의 메시지를 전하는 매니저 역할을 한 거죠. 대학(서울대 무역학과) 저학년 때는 베벨의 『부인노동론』을 읽으면서 새로운 의식의 세계에 눈뜬 기억이 나요.” 그러면서 “여성 우대는 못해도 박대는 말아야지….”라며 말을 이었다.
“사실 말은 쉽지만 여성들의 노동에 대한 헌신이 남성보다 못하다고 보는 시각도 많지요. 나도 알지만 사회적 비용이라고 여겨 1980년대부터 남녀 임금 차별을 안 뒀어요. 또 남녀평등 인사를 하고 있어요. 다만 남성이 군대에 2년 다녀온 경력은 인정해줘요. 내가 사업 시작한 후 스웨덴을 많이 다녔어요. 80년대부터 스웨덴은 일터에서 여성을 차별 대우하지 않더라고요.”
사업가 DNA를 물려받다
그는 서울 돈암동에서 태어났지만 고향은 창녕이다. 창녕에서 성씨 일가가 남긴 자취는 넓고도 깊다. 1876년 흉년이 들자 성 회장의 고조부가 땅을 팔아 주변 사람들을 구제했고 조부 역시 일제강점기 때 사재로 자양강습소라는 신학문을 가르치는 학교를 세워 인재 양성에 나섰다. 서울에서 출판사를 운영하던 선친은 1·4후퇴 때 고향으로 피난을 간 후 가난한 농민들을 두고 떠날 수 없어 눌러앉았다고 한다. 시골에 환금 작물인 양파 신농법을 가르치고 선진 유통 체계를 들여온 덕에 농민들의 고된 삶은 윤택해졌다. 창녕이 양파 주산지가 된 배경이다. 지금 우리가 쓰는 양파망도 그의 선친이 고안한 것이다.
-선친께서 1963년 우리나라 최초의 농민 자조 단체인 경화회(耕和會)를 만들었는데요. 작고하기 전에 자신이 운영하던 협성농산의 많은 주식을 경화회에 기부하셨다고요.
“경화회가 올해 53주년을 맞았어요. 새마을 운동의 전신이자 자조 운동의 원조였죠. 제가 얼마 전 창녕에 경화회관을 새로 지어 기증했어요. 1200평 공간인데 화왕산이 잘 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있어요.”
-조부가 1920년대 마산에서 미곡 수출 사업을 했고, 선친도 사업을 하셨지요. 친형 성기상 회장과 동생 성기준 사장이 가업을 이어받아 푸드웰을 경영 중이니 사업가 DNA를 물려받은 셈이네요.
“이상한 꼼수를 부리지 않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사업하는 걸 배웠지요. 선친은 고결하고 정직한 어른이었죠.”
-아버지가 준 경영 메시지가 있다면.
“우리 어른은 윤리적이면서도 실용적인 분이었어요. 실사구시적이었죠. 고 정주영 회장의 경영 어록인 ‘이봐 책임자, 해봤어’라는 말이 유명하잖아요. 도전정신을 늘 강조하셨죠.”
-창녕의 성씨 고가 30채를 복원했는데.
“우리 일가가 살던 집 30여 채 중 불탄 16채를 복원했어요. 1997년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고향에 가보고 싶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가보니 안 되겠더라고요. 그때부터 고가들을 해체한 뒤 재조립했지요. 경남 문화재로 지정돼 있어요.”
성 회장은 대학 졸업 후 가발·스웨터 수출업체인 서울통상에 들어가 1년반 동안 회사원 생활을 했다. 신입사원 때부터 “내가 사장이다”라는 생각으로 일했다고 한다. 업무 적응력이 높고 영어도 잘하는 그에게 회사는 스웨덴과 유럽 거래처를 맡겼다. 유럽 회사와 국내 스포츠웨어 하청업체를 연결해주는 업무를 보면서 세계 시장이 얼마나 크고 넓은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1974년 지인 2명과 함께 영창실업을 인수해 창업의 길을 걷는다. 동년배의 서울대 상대생들이 관직이나 금융권에 나간 것과 다른 행보다. 첫 회사명은 영창진흥. 6개월 뒤 이름을 바꿨다. 사명인 영원은 팝 가수 클리프 리차드의 히트곡 ‘더 영 원스(The Young Ones)’에서 따왔다.
그의 배포와 추진력을 말해주는 일화가 있다. 창업 이듬해 공장을 짓기도 전에 당시 세계 최대 스키복업체로부터 고가품 해외 수주에 성공한 것이다. “6개월간 공장을 만들어 옷을 납품할테니 한번 믿고 맡겨주세요!” 미국 화이트스텍의 도널드 케네디 회장은 성남 공장 부지를 둘러본 후 한국 청년 성기학의 패기에 “품질이 나쁘면 반품하겠다”는 조건으로 오리털이 들어간 스키복 1만벌을 주문했다. 성기학은 동료들과 밤샘작업에 돌입했고 약속대로 스키복 9600벌을 미국행 배에 실어보냈다. 납품한 스키복은 순식간에 팔려나갔고 화이트스텍은 영원무역이 검수 과정에서 걸러낸 400벌까지 미국으로 가져가 판매했다.
1984년 영원무역의 단독 오너가 된 후 그는 아웃도어 시장에 눈을 돌렸다. 국내에선 아웃도어라는 용어조차 낯설었지만 선진국에선 아웃도어 열풍이 불기 시작하던 때다. 그는 대학 산악반 시절 설악산 등반 때 만난 일본인 등반객이 입은 다운재킷에 충격을 받아 언젠가 한국도 이 시장이 뜰 것이라고 눈여겨 봐왔다고 한다. 다운웨어, 스키웨어뿐 아니라 방수복, 쿨맥스, 고어텍스 같은 제품도 그가 국내에 제일 먼저 소개했거나 직접 개발했다. 아웃도어 시장을 블루오션이라고 본 판단은 적중했다.
“섬유산업은 사양산업은 아니죠. 제봉업은 임금이 올라가면서 경쟁력이 좀 사라졌지만 섬유업을 제봉업으로만 볼 수 없거든요. 스포츠, 패션, IT 등과 서로 결합해서 만들기 때문이죠. 우리 기업들은 섬유가 사양이니 전자를 해야겠다는 쏠림 현상이 있어요. 일부 시장만 좁게 보지 말고 세계 시장을 보면 섬유는 중요한 산업이지요.”
아웃도어 황제로 우뚝 서다
영원무역이 꾸준한 성장세를 기록한 비결은 기술력에 있다. 그는 경기도 성남에 1976년 국내 처음으로 다운의류 생산공장을 세워 생산했고 1986년 고어텍스 생산도 처음 시작했다. 그는 아웃도어 제품에 대한 가격 거품 논란에 대해 “다른 브랜드보다 비싸게 책정하지 않았다”며 반박했다. “30년지기 친구가 있는데 우리 옷을 30년째 입고 있더군요. 내게 이래서야 장사를 어떻게 하느냐고 물어요. 우리는 원단과 봉사를 좋은 걸 쓰거든요.”
미국 아웃도어 브랜드인 노스페이스를 국내에 선보인 게 1997년이다. 외환위기 때 그는 “불황에 시작하는 사업일수록 더 잘된다”는 확신으로 밀어붙였다고 한다. 일본 골드윈과 합작해 골드윈코리아를 설립한 후 들여온 노스페이스는 ‘국민 교복’이라는 애칭을 얻을 만큼 대박을 터뜨렸다. 그 역시 아웃도어 업계의 황제로 떠올랐다. 이제는 산에 가지 않아도 도심에서 아웃도어를 일상복으로 입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사업이 위기를 맞은 적은 언제였나요.
“방글라데시에 사이클론이 불어와 새로 지은 공장이 바닷물에 다 잠겨 옷 30만장을 버려야 했던 적이 있어요. 또 1995∼96년경 미국 노스페이스가 경영난에 빠졌을 때 우리 바이어들이 빨리 손 떼라고, 이제 여기는 끝났다고들 했어요.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할 일을 다하려고 했지요. 그때 물품을 방글라데시에서 미국으로 다 옮겨서 보세창고에 갖다 놓았어요. 미국에 있어야 재화가 된다는 생각에서였죠. 캐시플로어(현금 흐름)에 도움이 된다면 필요한 만큼 조금씩 가져다 팔도록 했어요. 결과적으로 성공했지요. 진짜 수없이 고비를 겪었죠. 그걸 끈기로 극복해낸 게 우리 회사의 저력이죠.”
-아웃도어 한우물만 파서 세계 시장을 제패했습니다. 우리 기업이 세계적 경쟁력을 갖추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노동 생산성이 세계 10위권은 안 되잖아요. 경쟁을 두려워하지 않고 미래를 내다봐야죠. 잠재성장률을 높일 수 있도록 제반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직원들도 좋은 교육 시켜야 하고, 회사의 정직성과 합법성도 높여야 장기적으로 글로벌 경쟁력을 갖는 거죠.”
-성공한 기업인으로 경영 철학이 있다면.
“나는 사실 구호경영하는 사람은 아니예요. 하지만 42년간 오랫동안 견딘 기업인으로 경영 철학은 있지요(웃음). 그 비결은 4가지예요. 우선 포기하지 않았고, 작은 조짐도 중시했어요. 또 경쟁심을 가지고 시장에 나섰고, 눈앞의 성공과 긴 성공을 같이 중요하게 여겼죠. 장․단기 경영이 조화를 이룰 때 좋은 성과가 나와요. ‘천천히’ ‘한걸음부터’라는 말이 있지만 시장은 기다려주지 않아요. 덤빌 때는 팍 덤벼야 하죠. 나는 공장을 지을 때 너무 정밀하게 안 하고 70% 얼개만 만들어둡니다. 시장은 끝없이 바뀌거든요. 시장에 맞는 공장이어야지. 공장을 완벽하게 지어놓으면 나중에 시장과 안 맞아요.”
-개인이 경쟁력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효율성을 키우고 신뢰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죠. 신뢰는 스피드 경영에서 굉장히 중요해요. 잘해보겠다는 의지는 반드시 있어야죠.”
성 회장은 시장 개척에선 도전적이지만 결제는 깐깐하게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지금도 회사에서 단돈 100달러 나가는 클레임까지 직접 사인한다. 그는 인터뷰에서 혁신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그러면서 창녕 고택의 당호 이야기를 꺼냈다. “창녕 시골집의 ‘경근당’이라는 사랑채에서 내가 자라났어요. 그곳엔 ‘일신당’이라고 손님을 모시는 정자가 있었어요. ‘경근’(敬謹, 노동 존중)과 ‘일신’(日新, 날마다 새롭게 함)이 내 좌우명이 됐고 영원무역의 경영 요체가 됐다고나 할까요.”
성 회장은 딸만 셋이다. 서울 동숭동에 있는 목금토갤러리 이선진 관장과의 사이에 시은, 래은, 가은을 뒀다. 세 딸은 모두 영원무역에서 경영 수업 중이다.
영원무역은 평창동계올림픽 스포츠의류 부문 공식 후원사다. 그는 산악인들을 오랫 동안 후원해온 것으로도 유명하다. 고 박영석 등 정상급 산악인부터 김자인, 신윤선 등 클라이밍계의 주역들을 꾸준히 후원해왔다. 지난 2014년에는 한국섬유산업연합회 회장에 취임해 국내 섬유패션 업계를 이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