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푸른 기운을 힘껏 내뿜는 담팔수 사이로 듬성듬성 서 있는 이름 모를 가로수. 그 밑에 비바람에 떨어져 소복이 쌓인 낙엽을 일부러 밟으니, 올레 길을 20km 이상 걸을 때 지친 다리와 아픈 발바닥을 조금이라도 편히 하려고 갓길의 잡초를 밟고 걷는 것처럼 기분이 좋다.
일본에 근무할 때 유행하던 젖은 낙엽족(누레 오찌 바)가 생각난다. 평생을 가정 일은 아내에게 맡기고 바깥일만 몰두하는 회사인간으로 지내다 갑자기 정년이 되어 집에 들어 앉게 되면, 자기 주변정리는 고사하고 혼자서는 식사도 챙겨 먹을 줄 몰라 마치 길바닥에 떨어져 아무리 쓸어도 잘 떨어지지 않는 비에 젖은 낙엽처럼 아내의 치마폭을 붙잡고 놓지 않는 이들에게 붙여진 표현이다.
해도 해도 끝도 없고 표시도 나지 않는, 하지만 조금만 신경 쓰지 않으면 ‘집에서 뭐 하고 있냐.’고 가족들의 핀잔을 받게 되는 주방일과 집안 청소, 아이 돌보기 등등. 우리네 세대는 아니, 나는 그 많고 손가는 성가신 일을 ‘내가 번 돈으로 가족을 부양한다.’는 핑계로 등한시 해왔다. 얼마 전 특정 지역 출신 남편들이 가사 분담을 하지 않고 가장 보수적이라는 통계가 발표 된 적이 있는 지역 출신이라 그런지 모르겠다.
반면 요즘 젊은이들은 현명하다. 어쩌면 세상의 변화와 추세를 잘 읽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TV만 틀면 먹방 프로그램의 영향도 없지 않겠지만, 요리를 해서 아이들을 먹이고 돌보는 등 육아에도 적극적이고 아직 제도만으로 존재한다는 비판이 있지만, 내가 다니던 직장에도 드물지 않게 육아휴직을 하는 남편도 있었다. 신혼 초부터 가사 분담 서약을 하는 드라마의 내용 또한 별반 신경 안 쓰고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여권신장의 결과인지 결혼하기 어려운 시대상의 반영일지는 둔감한 필자보다 여러 분이 더 잘 판단할 것 같다.
모 간장회사 회장의 갑 질로 어르신들의 매너와 관련한 보도가 눈길을 끈다. “귀 잘 안 들려 목소리 커지는 것”, “다리 수술로 힘들어 지하철에서 자리 양보를 바란다”는 얘기 등등. 입장 바꿔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하지만, 아무에게나 반말을 하거나 바뀐 공공질서 관념을 무시하는 것을 교육받지 않아서라고 치부만 해선 안되리라 본다. 젖은 낙엽족 현상이나 시니어 예절에 등을 돌린 막무가내 어르신이 당당하던 사회는 지났다. 역지사지로 우리의 선조들은 남을 배려하고 생각하는 것을 삶의 기본으로 삼았다.
평생 조직인으로 헌신하다 가사를 등한시 했다면, 앞으로는 생각을 바꿔야 한다. 정년퇴직만 하면 여생을 즐겨도 되던 시대가 아닌, ‘～라고 전해라’라는 대중가요 가사처럼 100세 시대이다. 열심히 집안 일도 챙기고 아내가 곰국을 끓여도 걱정을 하지 않을 정도로 밥도 해 먹을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아직 젊은 세대라면, 아내가 남편에게 가사분담을 요구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 본다. 맞벌이 부부가 많아지고 새로운 세태를 반영하는 젊은 부부들에게는 문제가 없다.
나 같은 베이비 붐 세대 일부의 고민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