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수학에 능통… 무선통신 기술 기본 원리 발명

‘세계 최고 미모’에 발목 잡힌 삶

 

1938년 본격적인 할리우드 활동을 시작하자마자 스타로 떠오른 헤디 라마르. ⓒMGM
1938년 본격적인 할리우드 활동을 시작하자마자 스타로 떠오른 헤디 라마르. ⓒMGM

“유럽 최고의 미녀”라 불린 배우가 있었다. 나이 스물에 할리우드의 스타로 떠오른 오스트리아계 미국인 헤디 라마르다. 지난 9일 구글은 라마르의 101번째 탄생일을 맞아 특집 두들을 선보였다. 미모가 그의 전부였다면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세계가 다시 라마르의 삶에 주목하지는 않았을 테다. 라마르는 와이파이·블루투스 등 주요 무선통신 기술의 기본 원리를 고안해 특허를 출원한 발명가였다. 그는 삶을 스스로 개척하는 용기와 지성을 지녔으나, 타고난 아름다움으로 인해 사회활동과 경력에 큰 제약을 받은 여성이기도 하다. 

 

헤디 라마르의 101번째 탄생일인 지난 9일, 구글은 특집 두들을 선보였다. ⓒ구글
헤디 라마르의 101번째 탄생일인 지난 9일, 구글은 특집 두들을 선보였다. ⓒ구글

라마르의 삶은 한 편의 영화에 가깝다. 그의 생애는 제1·2차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의 격변기를 관통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그는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의 빈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헤드비히 에바 마리아 키슬러. 성공한 은행가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자란 그는 어릴 적부터 빼어난 미모를 자랑했고, 10대 시절부터 독일·체코 영화의 주연을 맡았다. 18세 때 출연한 구스타브 마하티 감독의 영화 ‘엑스터시’는 라마르의 이름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영화에서 그는 무관심한 남편을 두고 애정을 갈구하는 젊은 여성을 연기했다. 포르노가 아닌 극장 상영 영화 사상 오르가슴을 연기한 여배우는 라마르가 최초였다. 파격적인 누드 연기도 세간의 화제에 올랐다. 

이듬해 라마르는 13세 연상의 프리드리히 만들과 결혼했다. 부유한 무기상이었던 만들은 무기산업 관련 과학자·기업가들을 자주 집으로 초대해 모임을 열었다. 라마르도 모임에 자주 참석했다. 그의 전기를 쓴 리처드 로즈에 따르면 라마르는 화려한 이미지와 달리 사색과 토론을 즐기는 조용한 성격이었다. “라마르는 술을 마시지 않았고, 시끌벅적하고 화려한 파티도 즐기지 않았다.… 그에게 저녁을 풍요롭게 보내는 방법은 지적인 이들과 함께 둘러앉아 생각을 나누는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시계를 분해해 재조립하기를 즐길 만큼 과학과 수학에 관심이 많던 라마르는 자연스레 무기 기술에 흥미를 갖게 됐다. 그러나 이들의 결혼 생활은 파국으로 치달았다. 라마르는 1968년 펴낸 자서전 『엑스터시와 나』에서 만들이 “파시스트 같은 사람”이었으며 자신이 외출하지 못하도록 집에 가두고, 사회활동에 간섭하는 것은 물론 영화 출연도 막으려 했다고 밝혔다. 무솔리니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나치의 방위산업에 협조하는 남편의 모습에도 그는 절망과 혐오를 느꼈다. 

 

스펜서 트레이시(왼쪽)와 함께 출연한 영화 테이크 디스 우먼(1940) 속 헤디 라마르.
스펜서 트레이시(왼쪽)와 함께 출연한 영화 '테이크 디스 우먼'(1940) 속 헤디 라마르. ⓒMGM

이혼을 결심한 라마르는 남편 몰래 미국으로 떠났다. 도피 중 그는 ‘헤드비히’라는 이름을 ‘헤디’로 바꾸고, 1926년 세상을 떠난 유명한 여배우 바버라 라마르를 추모하는 뜻에서 ‘라마르’를 따 ‘헤디 라마르’라는 예명을 지었다.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MGM사와 계약하고 본격적으로 할리우드 활동을 시작한 라마르는 1938년 ‘알지에’를 시작으로 ‘붐 타운’ ‘화이트 카고’ ‘ 토티야 플랫’ ‘삼손과 데릴라’ 등 영화에 출연해 명성을 떨쳤다. 러브콜이 쉼 없이 쏟아졌다. 라마르는 클라크 게이블, 스펜서 트레이시, 잭 스튜어트 등 당대의 인기 배우들과 함께 작품에 출연했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지는 역할은 ‘미녀’ 캐릭터뿐이었다. 관객들은 라마르의 아름다움에 열광했고 그의 얼굴을 더 오래 보고 싶어 했다. ‘컴레이드 X’(1940) 같은 코미디 영화를 찍어도, 커리어 우먼을 연기해도, 라마르는 롱 클로즈업 신을 위해 조각상처럼 움직이지 않고 있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독보적인 미모는 그의 발목을 잡는 덫이 됐다. “내 얼굴은, 내 아름다움은 나의 불운이자 저주예요.” 라마르가 연기와 할리우드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한 것도 당연했다. 

 

“어떤 여성도 매력적일 수 있어요. 단지 가만히 서서 바보처럼 보이기만 하면 돼요.” 사진은 영화 더 헤븐리 바디(1944) 출연 당시의 헤디 라마르.
“어떤 여성도 매력적일 수 있어요. 단지 가만히 서서 바보처럼 보이기만 하면 돼요.” 사진은 영화 '더 헤븐리 바디'(1944) 출연 당시의 헤디 라마르. ⓒMGM

라마르는 과학기술 연구에 점점 더 열정을 쏟기 시작했다. 낮에는 배우로 활동하고, 저녁에는 귀가해 작업실에 앉아 갖가지 기계장치를 분해하고 개선점을 찾는 ‘이중생활’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포화가 막 시작되던 때였다. 아이들을 포함한 피란민이 탄 영국 원양 여객선이 독일 유보트 함대의 어뢰에 맞아 격침됐다는 소식에 라마르는 충격을 받았다. 연합군을 도울 방도를 고민하던 그는 잠수함이 수중 무선유도 미사일을 발사할 때 적함이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주파수 혼동을 일으키는 방법을 연구했다. 라마르와 아방가르드 작곡가인 조지 앤틸은 피아노의 공명 원리에 착안해 ‘주파수 호핑’ 기술을 개발, 1942년 특허를 출원했다.

 

헤디 라마르와 조지 앤틸이 낸 주파수 호핑 기술 특허 신청서 ⓒ위키피디아
헤디 라마르와 조지 앤틸이 낸 주파수 호핑 기술 특허 신청서 ⓒ위키피디아

 

1941년 뉴욕타임스 지에 실린 헤디 라마르의 발명 관련 보도. ⓒFlickr
1941년 뉴욕타임스 지에 실린 헤디 라마르의 발명 관련 보도. ⓒFlickr

 

1945년 미 군사 전문지 스타스 앤 스트라이프지에 실린 헤디 라마르의 발명 관련 보도.
1945년 미 군사 전문지 '스타스 앤 스트라이프'지에 실린 헤디 라마르의 발명 관련 보도. ⓒFlickr

라마르는 특허가 나자마자 미 정부에 기술을 기증했으나, 미 해군은 해당 기술이 어뢰 구조상 맞지 않는다며 사용하지 않았다. 한동안 빛을 보지 못하던 라마르의 특허 기술은 1950년대부터 재조명됐다. 트랜지스터의 발명으로 전자시대의 막이 열리면서, 라마르의 기술은 휴대전화 등 무선통신 기기에 쓰이는 CDMA(부호분할다중접속) 기술로 발전했다. 오늘날 널리 사용되는 블루투스, 와이파이도 그의 발명 없이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안타깝게도 라마르는 특허로 아무 금전적 이득도 얻지 못했다. 그의 특허 기술이 실용화됐을 때는 이미 특허 시효가 만료된 후였다.

1997년에야 라마르와 앤틸은 CDMA 기술의 기본 원리를 발명한 공을 인정받아 미국 전자개척재단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라마르의 수상 소감은 단 한 마디였다. “때가 왔군요.” 3년 뒤인 2000년, 라마르는 86세의 나이로 미국 플로리다 주에서 숨을 거뒀다. 그는 죽는 날까지도 그림을 그리고, 친구들과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사용한 휴지를 버릴 주머니가 달린 곽티슈 등 발명을 계속했다고 한다. 

헤디 라마르 구글 두들(클릭 혹은 아래로 화면 스크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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