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밤도 지났네』 이순례 작가

57세 결혼, 68세 사별, 73세 집필

자전소설 통해 가족의 아픔 드러내

사랑과 외면 그리고 도달에 관한 고백

 

자전적 장편소설 『오늘밤도 지났네』를 펴낸 이순례 작가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자전적 장편소설 『오늘밤도 지났네』를 펴낸 이순례 작가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죽어도 좋아요. 죽기 전에 썼으니까.”

죽기 전에 꼭 꺼내놓고 싶은 그 무엇. 그것이 인생을 움켜쥔 슬픔이자 비극일지라도 되새길 수밖에 없음은 차라리 운명이라 불러야 할까. 이순례 작가에게 그것은 분명 운명이라고 여겨진다. 올해 74세인 그는 지난 3년간 오로지 글쓰기에 몰두해 자전적 장편소설 『오늘밤도 지났네』(교수신문)를 펴냈다. 주인공 ‘윤서’를 앞세워 자신의 이야기를 담았다.

“남편이 갑자기 떠나고 2년 동안 매일 울었다. 눈물이 그냥 흘러내렸다. 그러다가 문득, 하나님이 주신 내 인생의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깨달았다. 울면서 시간을 낭비할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집요하게 숨어서 나를 따라다니던 그 매몰시키고 싶었던 기억을 끄집어내어 내 삶의 이야기를 완성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책상에 앉았다. 그때부터 쓰기 시작했다.”

1998년 그의 나이 57세에 6살 연상인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재혼이었고, 이 작가는 초혼이었다. 18일 동안 네 번을 만났고 네 번째 만난 날 결혼을 약속했다. 그렇게 11년 20일을 같이 산 남편은 갑작스런 이별을 안겼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심폐소생술로 피범벅이 된 얼굴과 멍든 가슴이 남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소설은 남편이 세상을 떠나던 그날의 기억으로 시작한다.

남편의 죽음은 또 다른 시작으로 이 작가를 안내했다. 그냥 매몰시킬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냈다. 남편에게조차 말하지 않았던 존재들이 고개를 들었고, “설령 이 진혼곡이 아무 소득도 없는 곤혹스러움으로 끝나버린다고 할지라도” 써내려갔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말하지 못했던 언니와 애인의 존재를 ‘인서 언니’와 ‘P.Jang’이라는 인물로 빚어 소설 속에 등장시켰다.

“구두의 앞창이 떨어져 너덜거리고 어깨까지 늘어진 흩어진 파마머리, 화장기 없는 얼굴과 확대되어 풀어진 동공, 좌우로 빠르게 움직이는 눈동자, 그것이 젖빛 안개 속에서 우리 앞에 홀연히 나타난 인서 언니의 모습이었다.”

1957년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하던 언니는 마을에서 유일한 병원 집 딸로서 선망의 대상이었고 희망이었다. 그런 존재가 하루아침에 무너진 모습으로 나타나자 가족은 외면과 침묵으로 대응했다.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지만, 언니는 정신을 놓았고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우리가 인서 언니를 죽인 거다.” 이 작가는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다룬 이야기는 외면이다. 우리 식구들은 인서 언니를 잊었다.” 가족의 아픔을 드러낸 그에게 원망은 없었을까.

 

남편의 죽음은 또 다른 시작으로 이 작가를 안내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남편의 죽음은 또 다른 시작으로 이 작가를 안내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가족의 반응을 걱정했는데 나도 놀랐다. 언니들은 ‘우리 집에 정말 똑똑한 딸이 있었구나’ 말해줬다. 그 누구도 화내지 않더라. 나는 정말로 자유로워졌다. 부끄럽지 않다. 두렵지 않다. 진실하고 싶었다.”

이 작품은 외면과 도달에 관한 이야기다. P.Jang은 그가 18세 여름부터 57세 봄까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만났던 유일한 존재다. 나중에서야 그것이 환상이었음을 알았다. 오랜 세월을 차지한 P.Jang과의 만남은 이 작가의 결혼과 함께 처참하게 부서져버린 영혼의 한 조각으로 남았다. 어차피 P.Jang과는 ‘어떤 집도 지을 수 없는 관계’였다. 그는 유부남이었다. 이 작가는 ‘윤서’의 입을 통해 이렇게 고백한다.

“그는 철저했다. 만남이 지나고 난 뒤의 처절한 단절. 그 단절에 나는 차츰 숨이 막혀갔다. 만약 그 어떤 진실의 느낌을 단 한 번만이라도 느꼈더라면 나는 말없이 그의 그림자로 일생을 살 수도 있었을 것인데. 그러나 그 이야기를 그에게 할 수는 없었다.”

“모래에 혀를 박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인서 언니처럼 사랑에 허물어지지 않는다” 다짐한 그는 무서울 만큼 철저한 P.Jang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 진정한 만남에서는 서로에게 도달할 수 있다고 믿으며 지탱했던 관계는 아직도 미완성이지만, 57세에 만난 남편에게 ‘도달’의 소망을 이뤘다. 많은 사랑을 아낌없이 주고 떠난 그와 여전히 ‘사랑의 긴 끈’으로 묶여 있다.

73세에 이 작품을 끝낸 이 작가는 “끊임없이 노력하면 나이가 들어도 헛되게 살지 않는다”고 말했다. 울며, 불며, 웃으며 길게 토해낸 인생의 기록. ‘윤서’의 독백과 그 많았던 눈물은 그에게 자유를 선물했다. 그를 억압했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80까지는 열심히 무작정 많이 쓸 거다.” 단호한 말투가 허투루 들리지 않았다. “난 기어이 사람 하나 또 만나야 해. 목숨 건 연애를 해야지.” 이 말 역시 그랬다. 『오늘밤도 지났네』의 ‘윤서’가 반짝이는 눈으로 내게 말했으므로.

 

오늘밤도 지났네(교수신문사)
오늘밤도 지났네(교수신문사)

저자 이순례는…

1942년 전북 김제에서 출생.

숭실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아시아연합신학대학원 평신도 신학원 졸업.

도서출판 명림당 대표와 한일장신대 겸임교수 역임.

학교법인 금성학원 이사, ㈔사랑의친구들 이사

저서로는 『예장 전국여교역자회 20년사』 『한일신학대학 70년사』『나의 사랑 나의 조국』( 이희호 여사 자서전) 『내가 만난 이희호』(편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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