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복지, 젠더로 접근하라 ③ 노후보장은 공적연금으로

사회보장제도 안착으로 노후생활 보장받지만

장기적인 경기침체로 연금재정 흔들

62세로 정년 연장 등 연금개혁 진행 중

 

“아직 건강하지만 다시 일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 연금으로 생활해도 큰 불편함도 없고 이렇게 오전엔 책 읽고, 오후에는 전시회를 가거나 운동을 하며 보내는 지금이 평화롭고 만족스러워요.”

프랑스 파리 중심에 위치한 뤽상부르 공원에서 책을 읽던 베티(69)씨는 “다시 일할 생각이 있느냐”는 물음에 손사레를 치며 ‘농(Non·아니요)’이라고 답했다. 현재 프랑스 상원의원 건물로 쓰이는 뤽상부르 궁전에 딸린 정원인 뤽상부르 공원은 파리의 대표적인 노인 휴식처로 꼽힌다. 공원 곳곳에 놓인 녹색 의자에 앉아 햇볕을 받으며 책이나 신문을 보거나, 함께 간단한 체조를 하고, 삼삼오오 모여 체스를 두는 모습이 쉽게 눈에 띄었다.

‘노인복지, 젠더로 접근하라’ 기획 취재를 위해 여성신문 취재진이 찾은 프랑스는 일하는 노인이 많은 일본과는 다른 양상이었다. 유럽에서 가장 빨리 고령화 사회에 진입해 오랫동안 고령화 대책을 만들고 시행한 나라답게 일하는 노인보다는 은퇴 이후에는 공적연금으로 생활하며 안정적인 노후를 보내는 노인들이 더 많았다. 프랑스는 이미 1864년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의 7%에 이르는 고령화에 접어들었다. 고령사회를 의미하는 14%는 1979년 넘어섰다. 3년 뒤인 2018년에는 초고령 사회를 뜻하는 20%에 진입할 것으로 프랑스 국립 경제통계경제연구소(INCEE)는 내다본다. 우리보다 앞서 고령화 사회를 경험하고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연금 체계를 구축한 나라인 만큼 프랑스는 세계 최고 수준의 사회보장제도를 자랑한다.

 

8월 26일 오전 프랑스 파리의 룩상부르그 공원에서 노인들이 모여 체스를 두고 있다. ⓒ프랑스 파리=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8월 26일 오전 프랑스 파리의 룩상부르그 공원에서 노인들이 모여 체스를 두고 있다. ⓒ프랑스 파리=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운동과 취미 활동하며 반려동물과 사는 삶

베티씨의 경우, 오전에는 공원에서 책을 읽거나, 일 주일에 네 번 정도는 파리 동쪽 외곽에 위치한 뱅센(Vincennes) 공원에서 동년배들과 함께 운동을 한다. 4시간 동안 16㎞를 걸으며 건강을 챙긴다. 오후에는 친구와 전시회를 다니거나,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사진을 찍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리는 것이 최근 재미를 느끼는 취미다.

3년 전인 지난 2012년 42년간의 노동자 생활에 마침표를 찍은 그는 “아주 넉넉하진 않아도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에 만족한다”고 했다. 그는 “인생의 빛줄기” 같은 고양이 솔레이(soleil·태양)와 단둘이 40㎡(12평) 크기의 아파트에서 산다. 한 달에 손에 쥐는 연금은 1850유로로 한화로는 약 246만원이다. 은퇴 전 받던 임금 2000유로의 90%를 넘는다.

베티씨는 “1500유로 정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연금 액수에 나도 놀랐다”며 “고양이와 둘만 살다 보니 생활비가 많이 나가지 않아 매달 시민단체에 400유로를 기부한다”고 했다. “건강이 허락되는 한 지금처럼 살고 싶다”는 그는 돌봄이 필요한 시기가 되면 노인 간병인 기관에 문의하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간단히 말했다.

 

8월 26일 프랑스 파리의 튈를리 공원 분수대 앞에 노인들이 앉아 있다. ⓒ프랑스 파리=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8월 26일 프랑스 파리의 튈를리 공원 분수대 앞에 노인들이 앉아 있다. ⓒ프랑스 파리=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재능기부 강연 준비에 시간 쏟으며 행복 느껴

취미생활을 즐기는 베티씨와는 달리, 대학에서 유전학 교수로 일한 모니크(Monique·70)씨는 2009년 정년퇴임 후 평온한 삶을 견디기 힘들었다고 했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기 힘들 것 같아 결혼과 출산은 남의 일로 여긴 채 홀로 살아온 그는 40년간 누구보다 연구와 ‘가르치는 일’을 사랑했다.

그는 “제 강의를 듣는 학생들과 눈을 맞추며 강단에 서는 일은 정말 행복했다”고 말하며 더 이상 강단에 설 수 없다는 사실에 아쉬워했다. 모니크씨는 최근 ‘지식 재능기부’를 하는 시민단체를 접하면서 다시 강연을 시작했다. “유전학을 시민들에게 쉽게 설명하고, 최신 과학 소식을 놓치지 않기 위해 강의 준비를 하느라 취미활동을 할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그의 눈에서 행복이 느껴졌다. 그는 또 “연금 액수를 밝힐 순 없지만 돈 문제를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면서 “돈을 위해 일하고 싶지 않다”고도 했다.

 

연금재정 문제 해결 위해 정년 연장 시행

공적연금만으로도 충분히 생활비를 댈 수 있고, 여가와 봉사활동까지 즐기는 파리 노인의 노후 생활이 부러웠다. 안정적인 사회보장제도의 근간에는 ‘사회연대’(solidarité)라는 프랑스 복지정책의 기본철학이 있다. 소수만을 위한 특권을 지양하고, 모두가 함께 잘사는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연대의 가치를 지향한다. 하지만 고령화 대책이 발달돼 있는 프랑스에서도 연금재정 문제는 연대라는 가치만으로 해결하기에는 한계가 있어 보였다. 모든 노인을 대상으로 안정적인 노후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정이 필요하지만, 프랑스는 장기적인 경기침체로 인해 경제성장이 정체되고 청년 일자리가 줄었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프랑스는 최근 정년을 기존 60세에서 62세로 연장했다. 노인들이 더 오랫동안 노동시장에 머물면서 연금 수급 연령을 늦추는 연금 개혁의 일환이다.

고령화 문제를 연구하는 프랑스 국립인구문제연구소(INED) 조엘 가뮤(Joelle Gaymu) 연구원은 “프랑스가 가장 빨리 고령화에 진입하면서 세계대전 직후 연금체계를 만드는 등 발빠르게 고령화 대책을 마련했으나, 고령화가 진행되면서 연금재정 문제가 이슈로 떠올랐다”며 “연금 개혁이 논의되면서 처음 등장한 정책이 정년 연장 정책”이라고 설명했다. 현행 프랑스의 연금제도는 높은 보장 수준으로 인해 연금적자가 2020년에는 207억 유로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프랑수아 올랑드 정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긴축을 통한 재정 건전화 달성, 노동시장 경직성 완화와 연금 등 사회보장제도 개혁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42년간 일하면 연금 수급액을 최대로 받을 수 있다. 하지만 프랑스 정부는 정년인 62세를 넘겨도 일할 수 있도록 권하고 있다. 연금수급 연령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서다. 가뮤 연구원은 “한때는 인건비 문제로 조기 은퇴를 장려하는 분위기였으나, 연금 수급 연령이 낮아지면서 정부의 연금재정 부담이 상당했다”면서 “이 때문에 정년 이후에도 일할 수 있도록 권하지만 의무 사항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청년 일자리가 부족한 상황에서 정년을 늘리는 것에 반감을 갖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정년을 미뤄도 임금은 이전에 받던 그대로다. “임금피크제에 대한 논의는 없냐”는 질문에는 그는 “없다”고 답했다. 임금피크제는 일정 연령이 된 노동자의 임금을 삭감하는 대신 일정 기간 동안 고용을 보장하는 제도다.

청년 일자리와 정년 연장의 균형은 프랑스 내에서도 굉장히 복잡한 문제다. 가뮤 연구원은 “하지만 프랑스 60~64세 인구의 경제활동참가율은 유럽에서도 최하위 수준일 것”이라며 “생활물가는 오르지만 연금 수급액은 정체돼 있어 한국처럼 폐지 줍는 노인 등 열악한 처지의 노인이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비관적인 분석도 내놨다.

 

8월 26일 오전 프랑스 파리의 룩상부르그 공원에서 노인들이 모여 기공체조를 하고 있다. ⓒ프랑스 파리=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8월 26일 오전 프랑스 파리의 룩상부르그 공원에서 노인들이 모여 기공체조를 하고 있다. ⓒ프랑스 파리=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유족연금·간병인 처우 문제는 ‘젠더’로 접근

프랑스는 비정규직, 시간제 일자리든 종사자든 누구나 공적연금에 가입할 수 있다. 다만, 소득과 가입 기간에 비례해 연금 수급액에 차이가 있다. 단 한 번도 일하지 않아도 연금을 받는다. 성별 임금격차로 인해 남성에 비해 소득이 적고, 육아와 가족 간병 등으로 연금 가입 기간이 남성보다 짧은 여성 노인들을 위한 맞춤형 노후보장 제도가 도입됐다. 대표적인 것이 남편이 사망한 후 남편이 받을 연금의 절반을 아내가 받을 수 있도록 한 유족연금제도다. 최근엔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이 높아지고 연금 수급액도 높은 경우가 많아지면서 이 제도를 폐지하자는 일부 의견도 있다. 가뮤 연구원은 “하지만 아직도 사별을 한 여성 노인 중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존속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최근 논의 중인 또 다른 이슈는 간병인 처우 문제다. 85세 이상 초고령 노인들을 돌보는 가족 간병인의 대다수는 여성인 상황에서 이들을 위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가뮤 연구원은 “프랑스는 비교적 노인이 살기에 좋은 나라인 것은 맞지만 전 생애에 걸친 성 불평등 문제는 낮은 임금과 육아로 인한 실직, 남성에 비해 낮은 연금 수급액으로 영향을 미친다”며 “사회 전반적인 성차별 문제를 시정하고 남성 중심적인 인식을 바꾸는 것이 여성 노인들의 건강하고 안정된 노후를 보장할 수 있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후원=한국언론진흥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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