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JPG

야구공은 시속 1백30km로 날아간다. 그 가속력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인가.

야구공에 원죄처럼 따라다니는 봉합선. 즉 꿰맨자국이 바로 그 힘

의 원천이다.만약 야구공에 봉합선이 없다면 야구공은 그렇게 멀리,

그렇게 빨리 날아가지 못한다고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절망과 상처를 딛고 일어난 흔적, 어둠과 질곡의 터널을 벗어난 자

국.그런 것들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과 무풍지대에서 과보호로 살아

가고 있는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어떤 판이함을 느낀다.

부품의 조립과정이 다르니 완성품 역시 다를 수 밖에 없는 건 지극

히 당연한 일.

재수를 해 본 학생이 재수해 보지 않은 학생보다 강하고, 혼자 1백

리 길을 걸어 본 사람이 자가용만 타고 다닌 사람보다 더 강하다.

인격은 고통속에서만 고양될 수 있다고 말한사람은 러시아의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

그래서 삶의 파노라마를 겪어낸 사람들에게선 ‘홍시같은 달디 단

맛’이 우러나온다.밋밋한 사람들에게선 도저히 느낄 수 없다는 삶

의 금자탑같은 것.

...며칠 전 K기자의 결혼식에 갔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토요일 오후였다.

그는 2년전쯤 내게 여자친구와의 ‘이루지 못할 사랑’을 호소해 왔

던 젊은이.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집안의 반대로 그들은 사랑의 벼랑에

서 있었다.

그러나 끝내, 여자는 목숨을 버리겠다는 엄마의 반대를 이기지 못

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고 말았다.

혼자 덩그마니 남겨진 그는 죽을만큼 비극적인 모습으로 나를 찾아

와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나 역시 어떤 말도 할 수 없었고 그냥 함께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그의 모습은 정말 오장육부가 다 쏟아져 나가버린 듯 텅 비어보였

고, 쾡 해보였고, 창백했고, 소슬해보였다.

그리곤 2년쯤 소식이 뚝 끊겼다.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었다는 소식만 들었을 뿐, 동서남북 어디를 둘

러봐도 감감무소식.

“참으로 영화같은 사랑 하나를 내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

았구나”하는 비현실적인 느낌까지 들었다.

가끔 그의 슬픈 모습이 생각났다.

그는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설마 죽지는 않았겠지?

팔, 다리가 잘려나가도 살 수 밖에 없는게 인간이니까 그도 어디선

가 살아가고 있을거야...

그런데 얼마전에 그에게서 전화가 온 것이다. 다짜고짜 찾아오겠다

고 했다. 한 옥타브쯤 올라간 목소리가 사뭇 경쾌했다.

내 앞에 나타난 그는 한사람의 친구를 동행하고 있었다.

며칠 후 결혼할 친구라고 소개했다.

가을이 깊어가는 낙엽속에서 우리 셋은 많이도 깔깔대며 웃었다.

그는 언제 그런일이 있었냐는 듯 멀쩡해 보였다. 여자도 맑고 순수

해 보였다.나는 겉으론 박자를 맞춰주면서도 속으론 내심 혀를 쯧쯧

차고 있었다.

‘쨔식, 벌써 잊어버렸군 그래. 나는 아직도 가슴이 아픈데. 저것좀

봐 새로운 친구가 이뻐죽겠다는 꼴이라니!’

속좁은 배반타령을 하고 있는 내가 스스로 보기에도 가관이었다.

하이고, 남 잘되는 게 배아픈 모양이지?’

웃겨도 여간 웃기는 내가 아니었다. 글쎄 이 상황에서 배반감은 왜

느낀다지?

그럼 그가 아직도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길 바란단 말인가? 맹세코

그건 결코 아니었다.

2년이라는 세월은 그가 치유되기에 그리 짧은 시간은 아니잖은가.

그의 마음속엔 아마도 사랑의 아픔이 봉합선으로 새겨있겠지.

꿰맨 자국때문에 오늘 저렇게 눈부시게 웃을 수 있는 거겠지.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그를 바라보니 여간 믿음직스러운 게 아니었

다. 이 마음의 요사스러움이라니!

그가 야구공이라면 봉합선이 보였을텐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인 관

계로 안보일뿐야. 사랑할 땐 누구나 다 그러잖아.

이 사랑 깨지면 죽을지도 모른다.

이 사랑 아니면 내 존재의 이유가 없다라는 생각들...

그러나 그 생각은 순간의 착각이기 십상이야.

인생 자체가 순간의 착각, 그 착각들이 모여 집합된 그림이니까. 그

착각들이 어쩌면 우리 인생의 봉합선이 되어 우리를 성숙시켜주는

힘이 되는 게 아닐까.오늘의 어려움을 치솟아 오르게 해주는 힘. 내

일의 가능성을 향해 날아가도록 해주는 힘.나는 생각해 본다.

내 인생, 지금까지 몇개의 봉합선으로 구성되어 있을까? 그것은

시속 몇km로 날아갈 수 있을까? 그리고 얼마까지 멀리, 날아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에 빠져 바라보니 인생이 꼭

야구장같다.

초록빛 잔디가 넓게 펼쳐져 있는 야구장.관객석에 누가 앉아 있을

까...

현대방송 홍보국장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