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자금 조달, 임시정부 뒷바라지 등
여성 독립운동가 ‘명예회복’ 시작 단계

전면에 드러나지 않아 입증 자료 부족
국가 차원의 전담 연구 지원 절실해

 

“후동 어머니 나 밥 좀 해줄라우?”

“암요. 해드려야죠. 아직 점심 안 하셨어요? 애 좀 봐주세요. 제가 얼른 점심 지어 드릴게요.”

여기저기 다니다가 배가 출출하면 서너 시쯤 백범이 우리 집으로 온다.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돌보며 독립투사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었던 정정화(1900~1991)의 회고록 『녹두꽃』의 한 대목이다. 위대한 독립운동가의 배경에는 늘 여성들이 있었다. 남편이나 아들이 투옥되면 옥바라지는 물론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지만, 여성 독립운동은 내조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정정화는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기 위해 압록강을 여섯 번이나 건넜다.

만주벌의 호랑이라 불리던 남자현(1872~1933)은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32년 만주를 방문한 국제연맹단 영국 리튼 대표에게 ‘우리는 조선의 독립을 원한다’는 혈서와 함께 왼손 약손가락 두 마디를 잘라 전달하며 독립을 호소했다. 평남도청 폭파사건의 안경신(1888~?)은 1920년 임신부의 몸으로 사과 장수로 위장해 폭탄 두 개를 광주리에 넣고 평남도청에 투하했다.

22세에 과부가 된 조신성(1873~1953)은 서북지역의 항일운동을 이끌며 맹산독립청년단을 조직했다. 그는 가슴에 다이너마이트를 품고 시시로 변장하며 일제의 삼엄한 경비를 피해 다녔다. 독립전쟁에 직접 참전한 오광심, 지복영, 박차정 등 여군들은 적군의 정보를 수집하고 학도병의 탈출을 지원했으며, 한국 첫 여성 비행사 권기옥은 중국 항일대전에 참전해 도쿄 폭파를 시도했다.

광복 70주년을 맞이해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는 여성 독립운동가의 활약을 알리는 ‘독립을 향한 여성 영웅들의 행진’ 기획전시가 23일까지 열린다. 그러나 여전히 여성 독립운동가 자료 수집과 발굴 등의 성과는 부실하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여성들이 독립유공자 포상에서도 대체로 낮은 훈격을 받았으며, 독립운동에 참여한 공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국가보훈처에 기록된 독립운동 참여자 10만여 명 중 여성 독립운동 참여자는 2%에 해당하는 2000명 정도다. 2015년 8월 15일 기준 ‘여성 독립유공자 포상 현황’을 살펴보면 지금까지 포상받은 여성 독립유공자는 265명으로, 전체 포상자 1만4197명 중 약 1.86%에 불과하다.

독립운동 참여자 발굴과 포상을 위해서 행형 기록인 판결문, 형사 사건부, 범죄인명부, 형사공소사건부, 신문 자료 등 활동 당시 기록이 필요하다. 그러나 유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증 자료 미미와 기준 미달, 행적 미상 등의 이유로 포함되지 못한 여성들이 많다.

김정아 국가보훈처 전문관은 “독립운동에 앞장서서 활동한 여성도 있지만, 남아 있는 자료가 없어서 포상이 어려운 상황”이라며 “기본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포상 기준은 똑같지만, 여성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기록이 없어 입증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1939년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입대하여 일본군의 정보 수집, 한국인 사병 위무 활동 등을 펼친 오희옥(1926~) 지사의 경우, 아버지 오광선 장군과 어머니 정현숙, 언니 오희영이 모두 독립운동을 했으나, 아버지가 1962년 독립장을 받은 후 30년이 지나서야 애족장 서훈을 받을 수 있었다. 여성 독립운동가를 재조명하는 일과 더불어 더 많은 유공자를 발굴하기 위해 국가가 주도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다.

강영심 이화여대 사학과 연구교수는 “여성 독립운동가를 연구하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라며 “굉장히 오랜 시간이 필요한 일이고, 전문적인 연구자가 참여해야 한다. 국가적인 차원의 집중적인 지원이 없으면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강 교수는 “그 당시를 기억했던 사람들조차 점점 수가 줄어들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더 찾기 어려워진다”고 지적했다. 어머니, 아내, 딸, 며느리로서 광복의 밑거름이 된 수많은 여성 독립유공자가 하루빨리 세상 밖으로 나와야 하는 이유다.

장석흥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은 “독립운동에 남녀를 구분할 수 없지만, 여성 독립운동이 크게 조명받지 못한 것은 사실”이라며 “독립운동가 아내들도 독립운동을 한 경우가 많지만, 남성 위주의 사회다 보니 상대적으로 가려졌다”고 말했다.

사형 구형을 받은 아들에게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마라”고 했던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이자 일생을 독립운동에 바친 조마리아(1862~1927)의 희생과 위대한 모성을 기억한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모성을 넘어 대의명분을 좇아 목숨을 내놓았던 수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희생과 그 정신을 되살리는 일을 결코 멈춰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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