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년 기념 ‘여성 독립운동가 특별 기획전’

 

대한독립여자선언서-1919년 3월 전후, 국내외에서 각종 선언서와 청원서가 발표되었지만 여성들의 이름으로 발표된 것은 대한독립여자선언서가 유일하다. ⓒ국립여성사전시관
대한독립여자선언서-1919년 3월 전후, 국내외에서 각종 선언서와 청원서가 발표되었지만 여성들의 이름으로 발표된 것은 대한독립여자선언서가 유일하다. ⓒ국립여성사전시관

광복 70년을 기념해 여성 독립유공자들의 업적과 활동을 알리고 광복의 의미를 되새기는 ‘여성독립운동가 특별 기획전’이 8월 12일부터 25일까지 2주간 서울 종로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린다. 전시를 주관하는 국립여성사전시관은 백척간두의 국난을 극복하고 민족의 독립을 이뤄낸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중심으로 특별기획전을 마련했다.

1905년 일본의 강압으로 체결된 을사늑약으로 주권이 빼앗기자 여성들은 전국 곳곳에서 구국의 길로 나섰다. 의병운동에 나서거나 국채보상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으며, 민족정신을 지키고자 송죽비밀결사대를 조직하기도 했다. 1913년 평양 숭의여학교를 중심으로 조직된 송죽비밀결사대는 민족정신과 애국심 고취를 목적으로 결성되어 경성과 평양의 3·1만세운동 등 항일운동에 참여했다. 여성 의병대원 윤희순(1860~1935) 등은 군자금을 모으거나 의병대를 조직해 여성들의 의병활동을 독려하는 여성 의병가를 만들기도 했다.

 

근우회 간담회. 1927년에 조직된 ‘근우회’는 여성해방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을 동시에 추구한 최초의 여성단체다. ⓒ국립여성사전시관
근우회 간담회. 1927년에 조직된 ‘근우회’는 여성해방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을 동시에 추구한 최초의 여성단체다. ⓒ국립여성사전시관

1919년 2월에 발표된 ‘대한독립여자선언서’가 발표됐다. 대한독립여자선언서는 임진왜란 때 진주의 논개와 평양 화월의 우국 충절 정신을 본받아 여성들도 의리의 전신 갑주를 입고, 유진무퇴하는 신을 신고 대한의 신성민족 독립을 향해 행진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후 여성들은 국내외에서 항일여성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여 체계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해나갔다. 대한독립여자선언서는 미주지역 여성 애국 단체들의 공식 행사에서 3·1독립선언서와 함께 나란히 낭독됐다. 국한문 혼용체로 쓰인 다른 선언서와 달리 1335자 모두 순 한글로 작성됐다.

대한독립여자선언서의 발표로 들불처럼 일어난 민족의 혼은 전국적인 3·1만세운동으로 이어졌다. 여성과 여학생의 주도로 이뤄진 3·1만세운동은 대한의 독립 의지를 세계 만방에 알렸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멈추지 않고, 국내외에서 항일단체를 결성하며 조직적인 구국 활동을 펼쳤다. 이들은 지역 내 한인끼리는 물론 단체 간, 더 나아가 임시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독립운동자금 지원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독립전쟁을 향한 정신적·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대한여자애국단 창립 17주년 기념(1936)-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멕시코, 쿠바 등 미주지역의 여성들을 단합하여  독립금을 모금했다. ⓒ국립여성사전시관
대한여자애국단 창립 17주년 기념(1936)-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멕시코, 쿠바 등 미주지역의 여성들을 단합하여 독립금을 모금했다. ⓒ국립여성사전시관

김마리아(1892~1944)는 일본 유학 중 2·8독립선언서를 갖고 비밀리에 귀국하여 대구, 광주, 평양, 황해도 등을 다니면서 독립운동을 독려한 여성 영웅이다. 3·1만세운동과 ‘대한민국애국부인회’ 등의 활동으로 2번의 옥고를 치르면서 물고문을 비롯한 극심한 육체적 학대, 성고문 등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일제의 삼엄한 감시망을 뚫고 상하이 망명에 성공했다. 그녀의 망명 성공은 일제에 당혹감과 패배감을 안겨준 동시에 억울함 속에서 고통 받는 우리 민족에게 희망을 가져다준 통쾌한 사건이었다.

전시회 2부에서는 위대한 독립운동가를 키운 어머니들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어머니와 가족은 민족정신의 중심으로서 민족 독립의 이유였으며, 나라 사랑의 원동력이었다. 독립자금 모금과 전달,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거나 아들과 남편이 투옥된 경우 옥바라지는 물론 가족의 모든 생계를 책임졌다.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는 사형 구형을 받은 아들에게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말고, 당당한 태도로 받아들이라며 강인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은 “나의 아들이 되기보다 나라의 아들이 되어라”라고 했으며, 윤봉길 의사 어머니 김원상은 “우리 봉길이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국내외 여성들은 수예와 자수품 판매를 통해 상해 임시정부를 지원했다. ⓒ국립여성사전시관
국내외 여성들은 수예와 자수품 판매를 통해 상해 임시정부를 지원했다. ⓒ국립여성사전시관

3·1만세운동 이후 세계 각지로 뻗어 나간 한민족 여성들은 독립정신을 이어나가며 독립전쟁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임시정부는 정의의 독립전쟁을 선포했고, 여성들은 한 가정의 아내나 어머니의 역할을 넘어 일제 관공서와 일본 총독을 겨냥해 폭탄을 던지기도 했다. 한국광복군이 창설되면서 조직의 일원으로서 적군의 정보를 수집하고 심리전을 통해 선전활동을 하는 등 항일독립전쟁에 참전했다. 독립전쟁에 직접 참전한 오광심, 지복영, 박차정 등 여군들은 적군의 정보를 수집하고 학도병의 탈출을 지원했다. 남녀노소 한민족 모두가 대동단결해 일제에 대항해 분투했고, 1945년 마침내 우리 민족은 광복을 맞이했다. 현재 수훈을 받은 여성 독립운동가는 248명이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