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참전 12개국 평화운동가 30명, 24일 DMZ 평화 걷기 행사
“분단의 상징 DMZ, 평화 지역으로… 화해와 협력의 발걸음 될 것”
넘어가고 넘어오는 / 산 그림자 바람의 그림자도 / 이 철조망에 걸려서 허리가 꺾어진다 / 비명 없이 지고 있던 태양도 / 핏물 붉게 흘리는 하늘 아래 / 나의 오랜 지병이 / 하필이면 왜 요통인지를 / 알아져서 더 아파라(유안진 ‘DMZ’ 전문)
6·25전쟁에 참전한 12개국 세계 여성평화운동가 30명이 24일 한반도 북쪽에서 남쪽으로 비무장지대(DMZ)를 가로질러 걸어가는 ‘국제여성평화걷기(Women Cross DMZ, 이하 WCD)’ 행사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이를 통해 천안함 폭침과 대북 5·24 조치 이후 악재가 겹치면서 경색 상태인 남북 관계에 물꼬가 트이길 기대하는 목소리도 높다. 2일 오전 서울 정동의 한 카페에서 WCD 한국위원회 공동대표인 이연숙 전 정무제2장관, 차경애 한국YWCA연합회 회장, 지은희 전 덕성여대 총장을 만났다. WCD 한국위 공동대표인 현경 미 유니온신학대 교수는 미국에 체류 중이라 좌담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행사에 참여하는 세계 여성 평화운동가들의 면면이 화려하다.
이연숙(이하 이)=세계적인 여성운동가인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WCD 명예공동위원장을 맡고 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북아일랜드의 메어리드 코리건매과이어와 라이베리아의 리마 보위가 참여한다. 24일은 ‘평화와 군축을 위한 세계 여성의 날’이자 대북 5·24조치 3년째가 되는 날이다.
차경애(이하 차)=세계 평화운동가들은 중국 베이징을 통해 북한에 들어가 21일 평양에서 ‘여성과 평화 만들기’를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고, 24일 DMZ를 넘는다. 이날 한국의 환영맞이 팀이 국제 평화운동가들을 만나 통일대교부터 임진각 행사장까지 함께 걷게 된다. 25일 오전 10시 서울시청 다목적홀에서 국제여성평화심포지엄도 연다.
-행사의 의의를 짚어달라.
지은희(이하 지)=도전적이고 새로운 꿈을 꾸는 사람들에 의해 역사는 진보한다. 국제여성평화걷기는 6·25전쟁에 참전해 전쟁의 아픔을 겪은 12개 참전국의 세계 여성평화운동가들이 유일한 분단국가인 한반도의 평화를 염원하며 함께 걷는다는 의미가 크다. 참가자 중에는 분쟁과 인종 갈등 등 처절한 역사적 경험을 한 사람들도 꽤 있다. 이 행사를 남북의 화해와 협력, 통일로 나아가는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
이=평화 유지는 온 인류의 희망이다. 이를 위해 피스 존(peace zone·평화 지역)을 넓혀나가야 한다. 국제여성평화걷기는 충돌을 예방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원하는 세계인들의 염원이 담긴 행사다. DMZ를 ‘피스 존’으로 만들자는 의미도 담고 있다. 평화 통일을 위한 국제적 액션이란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지=한국 여성운동의 네트워크는 베이징여성대회 이후로 확산됐다. 그동안 남북이 함께하는 운동의 핵심이 일본군위안부 문제였다면 이번 행사를 통해 통일까지로 넓어졌다. 국제여성평화걷기는 지난 3월 뉴욕에서 열린 유엔 여성지위위원회 기자회견을 통해 공개됐다. 이 프로젝트의 기획자는 크리스틴 안(WCD 국제공동대표)씨다. 2013년 뉴질랜드인 5명이 모터사이클을 타고 한반도 종단을 한 데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한반도를 종단하는 여성평화걷기를 글로리아 스타이넘에게 제안해 결실을 보았다.
차=이번 행사를 계기로 한국의 여성운동 지평도 넓어질 것이다. 국제분쟁 지역과 국제 평화운동에 한국이 더 많이 참여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통일에 대한 열망이 예전보다 크게 옅어졌다. 특히 청소년층은 더 심한데.
차=올해가 분단 70주년이다. 통일에 대한 관심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더욱이 미래 세대는 분단의 고통도 체감한 적이 없어 모른다. 분단된 현실을 미래 세대에 물려줘선 안 되는 것 아닌가.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 안보 질서가 요동치고 있다.
지=미·일 동맹도 그렇고 중국에 대한 미국의 입장도 그렇고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안보 질서가 심상치 않다. 남북이 양쪽 진영에 끼여서 대리 싸움도 할 수 있다. 지금은 남북이 화해와 협력을 통해 상호 연대할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시점이다. 남북 정치인들이 이 대목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어떻게 주체적으로 화해나 협력을 만들어내느냐가 중요하다.
이=분쟁 지역을 없앤다는 측면도 있지만 실속을 차리기 위해서도 통일이 절실하다. 남북한을 합쳐놓으면 경제적으로 굉장한 발전을 이룰 수 있다. 남북한 인구를 합치면 8500만 명, 해외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까지 합치면 1억 명쯤 된다. 북한의 국민소득이 2만 달러 수준이 되면 통일 한국은 일류 국가가 될 수 있다. 한국인의 특징이 열정과 탄력 아니냐. 이런 기질로 충분히 성장할 수 있다.
-여성들이 순진하다는 비판도 일부 있는데.
지=글로리아 스타이넘도 “여성의 투표권을 위해 행진을 시작했을 때도 똑같은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해냈다”고 말하지 않았나? 여성의 자기 권리 확보 과정은 무모함의 연속이었다. 그런 무모함과 순진함은 자기 확신과 열정 속에서 나왔고 이를 통해 역사가 발전한 것이다. 한반도 종단이 무모한 것만도 아니다. 1992년 9월 1일 이우정 선생 등 남측 여성계 대표 30명이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토론회’에 참석하기 위해 군사분계선을 지나 육로로 평양을 갔다. 당시 여성들은 민간 차원에서 최초로 군사분계선을 건넜다.
차=평화통일을 이루는 것은 꿈이다. 그 꿈을 이루고픈 순수한 마음이 있다. 이를 순진함으로 폄하해선 안 된다.
이=여성들이 순수하니까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 아닌가. 지금은 남북관계가 복잡해졌다. 세계 정세에 군사 문제까지 겹쳐 있다. 이런 때일수록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따지면 아무 것도 못한다. 순수한 마음으로 행동에 나서야 할 때다. 여성들은 이념성이 강한 남자들보다 실용적이다. 하지만 손익계산을 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통일을 해야 한다면 첫 발걸음을 내디뎌야 할 것 아닌가.
지=노벨평화상 수상자들이 이 일에 발벗고 나선 데서도 알 수 있지 않나. 여성들은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선 자기 이익을 따지지 않는다. 감수성을 갖고 실천하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 순진하다고 평할 수 있지만 이런 마음이 한반도의 평화에 대한 절실함이자 열정 아닐까. 박근혜 대통령은 드레스덴 선언의 연장선상에서 한반도 종단·대륙 철도 시범 운행을 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6·15 선언, 7·4 공동선언 등 남북 정부가 합의한 선언이 있는데 행사 허가가 아직 안 나온 것은 유감이다.(좌담회가 끝난 다음 날인 2일 북한은 조선중앙통신 보도를 통해 국제여성평화걷기가 5월 진행되며 이를 지원하고 있음을 대외적으로 공표했다.)
차=DMZ는 장벽이다. 한반도를 가로막은 장벽을 넘어 남북이 서로 소통하고 이해하고 평화통일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생각의 장벽도, 몰이해의 장벽도 넘어서야 한다.
통일운동의 출발점은 문화운동이다. 24일 임진각에서 한국YWCA연합회 주도로 조각보 퍼포먼스를 여는 이유이기도 하다. 남북한 여성, 국제 여성, 해외 동포 여성들이 함께 만든 공동 조각보를 임진각에서 완성하는 조각보 퍼포먼스가 진행된다. 이날 ‘2015 평화협정 희망의 해 선포식’과 가수 스윗소로우, 팝페라 가수 임형주, 국악인 이희문씨가 함께 하는 문화공연도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