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원고 김시연 엄마 윤경희씨
그날 이후 멈춘 엄마의 시계 “아침이 오는 게 매일매일 두렵다”
‘엄마의 날’ 챙겨주던 ‘깨박이’ 시연이 만날 희망으로 버텨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 앞에서 열린 ‘특별법 무력화 정부 시행령 폐기와 세월호 인양 촉구, 배보상 절차 전면중단’ 기자회견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이 비에 아랑곳하지 않고 삭발을 하고 있다.cialis coupon cialis coupon cialis couponabortion pill abortion pill abortion pillgabapentin withdrawal message board http://lensbyluca.com/withdrawal/message/board gabapentin withdrawal message boardwhat is the generic for bystolic   bystolic coupon 2013what is the generic for bystolic bystolic coupon 2013 bystolic coupon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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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스‧여성신문

“작년에 사고로 아들을 잃었다. (중략) 마지막으로 어미의 배를 빌려 태어난 이 땅의 아들딸들아, 제발 죽지만 말아다오. 남을 죽일 위험이 있는 짓도 말아다오. 설령 네 목숨과 지상의 낙원을 바꿀 수 있다 해도 네 어미는 결코 그 낙원에 못 들지니.”

고 박완서 작가가 쓴 ‘어미의 5월’ 중 한 대목이다. 이 글에서 세월호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을 떠올렸다는 이들이 많다. 자식을 먼저 저세상으로 보낸 것을 ‘참척(慘慽)’이라 한다. 세상에서 가장 참혹한 근심이란 뜻이다. 세월호 1주기(16일)를 앞두고 만난 단원고 유가족들은 바로 이 참척의 고통을 겪고 있었다.

“매일 아침이면 우리 시연이 머리도 말려주고 고데기도 해주고 학교도 데려다주곤 했는데 아이가 없는 아침이 매일 오고 그 아침이 오는 것이 매일매일 두려워요. 지금 이 순간도 아이를 볼 수 없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요. 금방이라도 올 것 같은데….”

단원고 희생자 김시연(2학년 3반)양의 엄마 윤경희(38)씨는 9일 서울 광화문 농성장에서 다른 세월호 유가족과 농성을 하고 있었다. 윤씨는 “아이가 미치도록 보고 싶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수학여행 간다고 친구들하고 즐겁게 춤 연습도 하고 가방에 짐 챙기면서 즐거워하던 딸의 모습이 생생한데 음악 교사를 꿈꾸던 그 아이는 지금 없다.

윤씨는 아이가 그리울 때면 스마트폰을 열어 저장한 사진을 본다. 해경안전교육원에서 보내온 시연이의 마지막 모습이다. 아이는 지난해 4월 21일 엄마에게 돌아왔다. 윤씨는 “겁먹은 시연이가 ‘구조대 왔어요. 구조되자마자 전화할게요’라고 울먹이던 목소리가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했다. 다른 엄마들이 돌아온 아이의 모습을 찍는 걸 보면서도 윤씨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나중에야 해경에서 사진을 구했다. 남들은 “사진을 보면 더 마음 아프지 않으냐”고 하지만 윤씨는 시연이가 그저 그리울 뿐이다.

광화문은 시연이와 가장 많은 추억을 쌓은 곳이다. 아이가 초등생 때 주말이면 이곳에 나와 청계천을 돌아보고 박물관도 다녔다. 처음 농성장에 있을 때는 옛날 생각이 나서 견디기 힘들었다. 윤씨는 “지난 1년 간 세월호 엄마들의 삶은 엉망이었다. 우리에겐 세월호 1주기가 아무 의미가 없다”고 했다. “배 안에 실종자 9명이 있고 분향소도 그대로 있어요. 제대로 조사도 이뤄지지 않았어요.”

윤씨는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이면 시연이가 더 새록새록 떠오른다고 한다. 아이가 두 살 터울의 동생과 만들어준 ‘엄마의 날’이기 때문이다. “한 달에 한 번 ‘엄마의 날’에 딸들과 놀러 다녔어요. 대학로도 가고 이대에 가서 옷도 샀어요. 시간 없으면 영화라도 꼭 한 편씩 봤지요. 우리 가족이 기념일을 챙기는 걸 좋아해요. 지난해 3월에는 시연이가 태어난 지 6000일을 기념해 케이크를 놓고 가족 축하 파티를 하기도 했는데….”

그날 이후 모든 게 달라졌다. 남편은 시연이를 잃은 아픔을 일로 풀려고 회사를 열심히 다니지만 집중이 안 돼 하루 할 일을 며칠씩 걸려서 하느라 야근이 다반사다. 집 근처 학원 교사로 일했던 윤씨도 업무에 복귀했지만 일주일 만에 그만두고 거리로 나섰다.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을 보니 시연이가 떠올라서 견딜 수가 없더라고요.”

윤씨는 올해 고1인 둘째 딸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게 가슴이 아프다. 일주일 전에는 광화문 앞에서 밤샘 농성을 하느라 밤 10시에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힘들게 귀가한 아이를 전혀 돌봐주지 못했다. 그나마 둘째 딸이 엄마에게 짜증을 부리지 않아 고마울 따름이다.

“둘째가 싫다고 하면 저도 이렇게 못 다니죠. 지난 1년간 너무 소홀했거든요. 내가 가장 슬프고 아픈 줄 알고 아이를 돌보지 못했어요. 그런데 둘째가 작년 가을부터 몸이 안 좋더니 장에 탈이 나더라고요. 자기도 모르게 스트레스를 받은 거예요. 겨울에는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어요.”

윤씨는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힘들게 간 아이만 하겠느냐”며 눈물을 쏟았다. “엄마들은 힘들어도 편히 있을 수 없어요. 아무도 모르잖아요, 아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친구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고통스럽게 죽어갔을까봐…. 엄마는 살아 있는데 내 자식은 아프게 죽었을 거예요. 엄마들은 힘들어도 ‘못하겠다’는 생각을 못 해요.”

너무나 힘이 없는 엄마들이 거리에 나선 이유이기도 하다. 윤씨는 이렇게 다짐했다. “돌아오지 않은 너의 친구들 다 돌아오는 그날까지, 너희에게 우리에게 이 아픔을 준 세상이 변하는 그날까지 너를 위해, 너희를 위해, 그리고 남아 있는 동생들을 위해 엄마 지치지 않을게.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하나님 곁에서 잘 있어. 사랑한다 내 딸 시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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