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퍼스에 봄기운이 감돈 어느 날 밀린 이메일을 읽어 내려가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중국의 반성폭력 운동을 하던 젊은 페미니스트 그룹이 중국공안에 체포됐으며, 이들의 석방을 위해 서명해 달라는 이메일이었다.
그런데 체포된 여성 활동가들 사진에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웨이팅팅 그녀였다. 지난 1월 아시아여성활동가교육(Ewha Gobal Empowerment Program)에 왔었던 중국의 참가자다. 다시 봐도 중국의 반성폭력 인권운동에 대해 열정적으로 토론하던 그녀가 분명했다. 눈을 반짝이며 대학에서 ‘버자이너 모놀로그’ 연극 공연에 참여했던 이야기를 하던 모습 그리고 20년 전 베이징여성대회가 지금의 중국 여성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재조명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모습도 기억이 난다.
일단 한국성폭력상담소와 여성 관련 커뮤니티 등 주변에 서명 요청 메일과 소식을 공유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그리고 며칠 후 “지금 중국 대사관 앞에서 여성·인권·시민 단체가 항의시위와 국제연대 기자회견 중”이라는 소식을 듣게 됐다. 사진 속이지만 현장의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플래카드에 쓰여 있는 “중국 페미니스트·LGBT 여성 활동가 석방과 탄압 중단을 요구하는 한국의 친구들”이라는 문구를 보니 왠지 마음이 울컥했다. 한국의 친구들…. 어떤 특정한 단체 이름보다 더 강렬한 느낌이 와 닿았다. ‘초국적 연대’의 바로 그 생생한 현장을 보는 것 같았다.
지구화 시대에 이제 여성문제는 더 이상 한 지역에 한정되거나 어떤 한 이슈에 국한되지 않고 있다. 가령 여성 이주는 한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 이동하는 두 국가 간의 문제를 넘어서 지구촌 전체의 불균형적 개발, 환경 파괴, 빈부 격차, 여성 빈곤 등의 문제와 결부된다. 또 여성 이주는 노동력의 이동뿐 아니라 결혼을 통한 여성의 거래, 성폭력, 가정폭력, 외국인 혐오와 차별 등 다양한 성 불평등이나 사회적 차별과 결합된다. 이런 지구촌의 변화 속에서 여성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보다 더 다원화된 관점을 갖고 다양한 활동들과 함께 연대해야 하는 과제를 갖게 되었고, 국가 간의 경계를 넘어서는 연대, 즉 초국적 연대의 필요성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여성 활동가들은 초국적 연대는 너무 멀리 있는 현장이거나 소위 ‘국제전문가’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또 국내에도 당면한 문제들 그리고 당장 해결해야 할 일들이 산적한데 ‘밖의 일’까지 관심을 쏟을 여력이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문제는 우리에게 당면한 문제들이 사실상 ‘밖의 일’ 혹은 지구촌의 변화와 분리돼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인도에서 일어난 성폭력 사건들과 이에 대한 여성들의 용기 있는 저항은 비단 인도만의 특수한 문제가 아니라 남성 중심 문화를 가진 모든 지구촌 곳곳에서 현재진행형으로 일어나고 있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 어떤 곳에서는 성폭력으로 또 어떤 곳에서는 민족분쟁이나 종교전쟁의 희생자로, 또 어떤 곳에서는 할례 등 여성의 몸에 대한 훼손으로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분명한 것은 여성에 대한 폭력과 인권침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여성주의에 대한 저항이 어떤 곳에서는 여성 활동가에 대한 정치적·종교적 탄압으로 또 어떤 곳에서는 폄하나 테러로 나타나지만, 이 모든 현상의 핵심에는 페미니즘에 대한 사회적 혐오와 불안이 자리 잡고 있다.
여성이 경험하는 각기 다양하고 서로 다른 억압과 경험을 직시하면서 동시에 이 억압의 지점들이 서로 만나고 연결돼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초국적 여성 연대는 훨씬 더 가깝게 그리고 더 많은 방식으로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여성들이 억압의 경험을 같이 모으고 저항의 기억과 전략을 나누고 함께 변화를 만들어 나가는 노력과 연대가 필요한 이유다. 베이징 선언 20주년을 맞는 올해 중국 여성 활동가를 위한 한국과 전 세계 페미니스트들의 국제 연대 활동은 그래서 더 큰 의미로 다가온다. 하루빨리 웨이팅팅에게서 반가운 소식이 있기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