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유/전교조 정책연구국장. 서울 서문여중 교사

“탁구공 100개를 세어보자”는 초등학교 2학년 수학 교과서의 내용을

놓고 교실마다 촌극이 벌어졌다. 실제로 탁구공 100개를 구해오라는

지시에서부터 탁구공 대신에 바둑알을 구해 오라는 궁색한 부탁에 이

르기까지 ‘좋은 취지’로 만들어졌다는 새 교과서의 열린 내용이 교

사와 아이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학년에서 단체용으로 10개들

이 10상자를 구입해서 쓰면 될 일을 왜 걱정하느냐는 의문을 갖는 이

들은 평소 초등교육에 대해 무관심했던 것을 반성해야 한다.

숫자의 구체적 조작단계를 입체화시키기 위해서는 개별적인 조작을

가능하게 하는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고, 그러자면 에누리없이 1인당

100개의 탁구공이 필요한 것이다. 새교과서 체계가 그러한 방식으로

편집되어 있고, 그 내용에 따라 준비물을 갖추다 보면 도리없이 ‘엄

마 숙제’와 ‘문방구 숙제’로 전락할 수밖에 없게 된다. 선생님들이

기를 쓰고 1,2학년 담임을 기피하고 있는 이유다.

공부 잘하는 아이는 더 어려운 내용을 가르치고, 공부 못하는 아이

는 그만큼 쉬운 내용을 가르친다는 7차 교육과정의 수준별 교육과정은

교육 수준에 따른 다양한 학습방법을 목표로 삼고 있는 교육과정이라

고 교육부는 자랑하고 있지만, 정작 학교 현장에서는 여건의 미비와

현실의 부조화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다. 뿐만 아니라 원래 만들어 놓

았던 실험본 교과서의 내용이 70%나 바뀌어 편집되었고, 그나마 개학

한 지 몇 주가 지나도록 교과서조차 공급받지 못하는 사례가 속출하

고 있으니 안타깝기 짝이 없다. 올해에 초등학교 1-2학년, 2001년에

는 초등 3-4학년과 중학교 1학년, 2002년에는 초등 5-6학년과 중학교

2-3학년, 고등학교 1학년에 속속 확대 도입하기로 한 7차 교육과정은

그런 면에서 아이들을 ‘실험대상’으로 몰고가고 있다는 비난을 면

치 못하고 있으며, 심지어 민주당을 비롯한 정당들조차 교육부를 향해

7차 교육과정을 우선 멈추고, 점진적으로 교과서를 개정할 수 있는

‘항시개정, 수시개편’체제로 바꾸라는 요구를 총선 공약으로 담고

있는 형편이다.

수학은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1까지 ‘가-나’반으로 20단계, 영어

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고1까지 8단계로 분반하여 우열반을 편성하는

‘수준별 교육과정’, 국어나 사회 등은 첫학년부터 고1까지 한 반에

서 잘하는 그룹과 못하는 그룹으로 여러 그룹을 나누는 ‘심화·보충

학습’, 고2부터는 80개에 과목에 이르는 선택과목을 골라 공부할 수

있는 ‘선택형 교육과정’ 등이 7차 교육과정의 골자라고 할 수 있다.

‘널리 볼 줄 아는’ 평등·대중교육을 탈피하여 ‘잘할 수 있는’ 교

육을 통해 경쟁력을 기르고 적자생존할 수 있는 체계로 만들어진 7차

교육과정은 사실 우리 나라처럼 대학 서열화가 존재하고 획일적인 입

시가 있는 환경에서는 적용하기 힘든 교육과정이다. 수준별 교육과정

(이동수업)을 앞당겨 실시했던 어느 고등학교의 사례를 ‘있는 그대

로’ 살펴보자.

학교에서 학생들은 수학과 영어를 성적 수준에 따라 A, B, C반으로

나누어 배운다. 시험이 끝날 때마다 보따리를 싸서 반을 옮겨야 하는

수모를 겪는 것은 기본이다. 시험지를 받아보면 기가 막히다.

배우기는 수준별로 따로 배웠는데 시험지의 내용은 A, B, C반이 동

일하다. A반은 100%, B반은 60%쯤, C반은 40%쯤 받아 안을 수 있

도록 출제된다. 보통반은 40%, 열등반은 60%나 배우지도 않은 영역

에서 출제되는 것이다. 열등생에게 60%는 어차피 모르는 영역이니

40%나 제대로 배워 점수 따는 것으로 만족하라는 것이다.

그 수모를 감당하기 싫으면 능력껏 A반에 들어가면 된다. 교사 입

장에서 그렇게 하기가 양심에 꺼리지만 엄연히 국가에서 정해준 교과

서가 있고, 내신관리상 공정성과 투명성을 유지하기 위한 학부모의 감

시의 눈길이 번득이고, 국가에서 출제하는 수능이 있는 한 마음대로

학생들의 수준을 성적이 아닌 취향, 소질, 적성대로 나눌 수 없다. 잘

하는 아이는 떨어질까 불안하고 못하는 아이는 영영 절망에 빠진다.

지적인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다.

학생의 학습 속도가 조금 늦다는 이유로 또는 학습 능력이 다소 부

족하다는 이유로 상위 단계의 교육과정에 접근조차 할 수 없다는 것

은 기회균등의 원칙에서 벗어난다. 우열반(수준별 교육과정)과 나머지

공부(심화보충학습)의 공포에 젖은 엄마들이 솜털 보송한 아이의 손

목을 잡고 속셈학원으로 달려가는 애달픈 심정을 교육관료들은 헤아려

보아야 한다.

하나의 정치적 강령에 불과한 아이디어를 학교 현장에서의 엄격한 검

증 없이 국가적 수준의 교육과정으로 받아들인 교육부는 더 늦기 전에

7차 교육과정을 철회하고 장관에게 주어진 교육과정의 ‘수정고시’

권한을 이용하여 지금이라도 현장 교사들의 의견이 충분히 반영된

‘국민 교육과정’을 새롭게, 점진적으로 국민과 함께 만드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결자해지의 정신이 필요한 때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