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만 나가면 의료 지원도, 직업 훈련도 끊겨
쉼터만 나가면 의료 지원도, 직업 훈련도 끊겨
  • 박길자 / 여성신문 기자
  • 승인 2018.02.28 11:14
  • 수정 2018-02-28 11: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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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대책, 위기 개입 수준의 단기적 미봉책에 그쳐
쉼터 취업훈련 3∼6개월뿐… 지원도 수급권 여부 따라 차별

누군가 죽거나 다쳐야 끝나는 범죄. 가정폭력은 인간의 존엄성을 맨 밑바닥에 떨어뜨리는 범죄다. 한 피해 여성이 “진짜 겪어보지 않고선 아무도 모른다”고 말할 만큼 인간을 인간 이하로 만드는 최고 수위의 폭력이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가정폭력에 무심하다. 지난 1월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안산 인질극 살해범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다. 집안 문제는 집안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독특한 가족주의 문화 탓에 폭력이 잘 드러나지도 않는다.

 

지난해 열린 가정폭력 예방의 날 보라데이 제정 기념행사 ⓒ뉴시스 여성신문
지난해 열린 가정폭력 예방의 날 보라데이 제정 기념행사 ⓒ뉴시스 여성신문

죽어야 끝나는 범죄, 가정폭력

가정폭력 피해자들이 마지막으로 찾는 의지처가 있다. 바로 상담소와 쉼터다. 정춘숙 전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는 최근 낸 박사학위 논문(강남대 사회복지학) ‘가정폭력 피해 여성의 자립 의지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에 관한 연구’에서 “상담소와 쉼터를 찾아온 가정폭력 피해 여성들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결혼 기간이 길수록, 남편에게서 폭력을 당한 기간이 길수록 자립 의지가 높았다”며 “이들을 ‘불쌍한 피해자’로 여겨선 안 된다. 자신의 존엄성을 지켜온 강인한 생존자라는 시각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보통 사람들은 오랫동안 가정폭력을 겪은 여성들이 심신의 파괴로 자립 의지가 약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정 박사의 연구 결과는 이와 달랐다. 피해 생존자들에게 터닝포인트 역할을 해온 상담소와 쉼터가 여성주의 관점에서 운영돼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연구는 지난 2013년 가정폭력상담소 이용자 148명과 쉼터 거주자 119명을 대상으로 실시됐다.

연구 결과 가정폭력 피해자들의 성평등 의식은 자립 의지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이는 곧 이들의 자립 의지를 높이기 위해 성평등 의식을 높여줄 교육 프로그램을 적극 마련해야 한다는 얘기다.

가정폭력은 성차별에서 갈래를 뻗는다. 기관마다 활동 내용이 달라도 여성주의 관점에서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 역시 성평등 의식을 갖고 있어야 여성을 평등하게 대한다. 성평등 의식이 낮다면 가정폭력을 개인 문제로 치부하기 쉽다. 그런데 쉼터가 크게 늘고 사회복지 서비스가 강화되면서 여성주의 관점이 약해졌다는 지적이다.

여가부에 여성주의 관료 있나

가정폭력방지법이 제정된 지 올해로 18년을 맞았지만 정부 대책은 단기적 미봉책에 그쳤다는 여론이다. 박영란 강남대 교수(사회복지학)는 “획기적이고 근본적인 변화는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가정폭력 상담을 받는 여성들이 대다수일 뿐 쉼터까지 가는 여성은 극소수다. 응급실에 실려간 후에야 쉼터에 입소한다”며 “가장 중요한 것이 피해자들의 홀로서기다. 자립 지원이 핵심인데 지금은 정부 대책이 위기 개입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평했다.

전문가들은 여성가족부의 적극적인 정책을 주문했다. 가정폭력이 가부장 제도의 결과라는 관점에서 구조적 개선을 위해 충분한 예산 확보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늘 다른 정부 부처와의 논쟁에서 밀릴 때가 많다. 여성가족부에 여성주의 관료(페모크라트·femocrats)가 부족해서인지 이런 적극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지금 같은 일시 보호 중심의 가정폭력 피해자 지원 정책은 달라져야 한다는 지적이다. 우리나라는 가정폭력 피해자 지원 정책이 상담소와 쉼터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이런 단기적·일시적 지원 정책에서 벗어나 피해 여성들의 욕구를 반영한 장기적이고 본질적인 접근이 절실하다.

쉼터를 이용하는 가정폭력 피해 여성들에 대해선 조건 없는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 지금은 가정폭력 피해 여성들이 쉼터에서 기초생활 수급 여부에 따라 지원을 다르게 받는다. 자립지원금이나 주거지원, 긴급생활보호 대상자 지정 등 피해 여성의 자립을 돕는 적극적인 정책이 절실하다.

비전통적 여성 직종 직업훈련 해야

가정폭력 특성상 자립에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가정폭력 피해자들은 남편이 쫓아다니기 때문에 4대보험이 적용되는 직장을 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상담소나 쉼터를 이용하지 않으면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것은 큰 문제다. 쉼터만 퇴소하면 피해 여성 지원이 바로 끊긴다. 의료 지원은커녕 직업훈련도 못 받는다.

피해자들의 직업훈련도 지금과는 달라야 한다. 가정폭력 가해 남편으로부터 독립하려면 여성들이 직업훈련을 체계적으로 받아야 한다. 정 박사는 “쉼터에서 진행 중인 취업훈련은 3∼6개월이 전부다. 훈련 과목도 제과제빵, 도배, 미용, 컴퓨터, 한식조리사 등에 머물러 있다”며 “고임금 직종으로 진출하거나 향후 발전 가능성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비판했다. 직업훈련이 전통 여성 직종에 국한된 것은 단기 취업 위주로 운영되기 때문이다. 전통 직종은 대부분 임금이 낮고 미래 유망 직업이 아니다. 비전통적 여성 직종 훈련이 가능하려면 장기 프로젝트로 운영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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