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하 직원 보고 침대방에서 “자고 가라”는 상사… 대법원 “성추행 아니다”
‘추행’ 판결 기준 거꾸로… “가해자 관점의 황당한 판결”

 

노무현 전 대통령 차명계좌 발언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조현오(59) 전 경찰청장에게 대법원이 실형을 확정한 13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법정 앞을 시민들이 지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차명계좌' 발언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조현오(59) 전 경찰청장에게 대법원이 실형을 확정한 13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법정 앞을 시민들이 지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성폭력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국민 정서에 어긋나 거센 비판을 받고 있다. 우리 사회의 인권 수준이 높아졌는데 대법원이 오히려 시대착오적 판결을 내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대법원 1부(주심 이인복 대법관)는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서모(61)씨에게 벌금형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춘천지법으로 돌려보냈다고 2일 밝혔다. 세탁공장 소장인 서씨는 2011년 6월 직장 동료로부터 밥상을 구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신제품 밥상을 들고 찾아온 여직원 A(52)씨에게 캔맥주 1개를 건네주며 사택 침대방으로 유인했다. 서씨가 “잠깐 있다가 가라”며 맥주와 담배를 권하자 마지못해 5분 정도 함께 있다가 어색함에 일어서자 한 손으로 A씨의 오른쪽 손목을 세게 움켜쥐고 당기면서 “자고 가요”라고 말했다. A씨는 직위를 이용해 성추행했다며 서씨를 형사 고소했다. 앞서 1·2심은 “업무상 자신의 감독을 받는 A씨를 위력을 이용해 추행한 것”이라며 서씨에게 벌금 300만원을 선고했다.

대법원이 시대에 뒤떨어진 판결을 한 것은 이번뿐만이 아니다. 대법원은 2010년 7월 발생했던 해병대 성폭력 사건 가해자에 대해 1·2심 판결을 뒤집어 무죄 판결을 내렸다. 연예기획사 대표가 중학 2학년 여학생에게 상습적인 성폭력을 저지른 사건에 대해서도 해당 사건을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가해자는 아동·청소년성보호법상 강간 등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2년, 2심에서 9년을 선고받았으나 대법원이 무죄 판결을 내린 것이다.

회사원 최수빈(28‧경기도 과천시)씨는 “법관들은 자신의 아내나 딸을 이렇게 대해도 성추행으로 보지 않는다는 이야기냐”며 “비정상적이고 몰상식적인 판결이다. 이런 식이면 도대체 대법원은 왜 필요하냐”며 혀를 찼다.

상급자가 부하 직원의 손목만 가볍게 잡은 것도 아니고 “자고 가라”고 했는데 이게 추행이 아니면 어떤 행동이 추행이 되느냐는 게 여성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더욱이 대법원은 스스로 ‘자기부정’을 했다. 대법원은 1998년 1월 23일 판결에서 “추행이란 객관적으로 일반인에게 성적 수치심과 혐오감을 일으키게 하고 선량한 성적 도덕관념에 반하는 행위를 말한다”고 규정한 바 있다. 이후 성추행 판결에선 이 기준이 주요하게 작용해 왔다. 이번 사건 역시 대법원이 말하는 추행 기준에 딱 맞게 떨어지는데 대법원이 자신들의 판단을 거꾸로 뒤집은 것이다.

김엘림 한국방송통신대 법학과 교수는 “밥을 먹고 가라는 것도 아니고 손목을 잡고 자고 가라고 했는데 어떻게 이런 판결이 나왔는지 모르겠다”며 “성기를 만져야 추행이 되느냐. 사건이 일어난 맥락과 정황을 봐야 하는데 대법원은 이런 점을 간과했다”고 지적했다.

미국에선 성추행 소송의 경우 피해자와 같은 성별의 사람들이 어떻게 느꼈는지를 주요하게 본다. 인간이 사회화되는 과정에서 성적 행동을 수용하는 데 있어 남성과 여성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인식에서다. 김 교수는 “보통 법관들은 남성이라 ‘이게 무슨 성적 희롱이냐’고 느낄 수 있으나 피해자가 여성인 경우 일반 여성들이 어떻게 느꼈을지 따져야 올바른 판결이 나온다”고 강조했다.

여성단체들도 ‘어이없는 판결’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조재연 한국여성의전화 성폭력상담소 부장은 “원심 판결을 뒤집을 만한 새로운 증거도 없는데 파기환송한 것은 성폭력을 바라보는 관점이 1· 2심과 달랐기 때문”이라며 “피해자가 성적 수치심을 느꼈고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받았으면 성폭력이다. 신체 부위로 성폭력 여부를 규정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강력히 비판했다. 머리를 쓰다듬으면 성폭력이 아니고 가슴이나 엉덩이를 만져야 성폭력이라고 보는 것은 매우 낮은 수준의 인식이라는 지적이다.

하지만 대법원 판례를 보면 여전히 성적 수치심을 느낄 만한 신체 부위를 기준으로 판단해온 경우가 대부분이다. 조 부장은 “직장 내 성폭력이 데이트 폭력 다음으로 상담이 많다”며 “하지만 대부분 불기소이고 피해자가 법적 대응하기도 어렵다. 심지어 피해자와 가해자가 업무상 관계인데 데이트 관계로 몰아가는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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