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상속문서 통해 시대상 알려
남녀평등과 사회적 약자 배려하는 철학 엿보여
물질만이 아니라 정신과 가훈까지 승계

 

지난 10월 말부터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특별 전시되고 있는 ‘조선시대 재산상속기록, 분재기-공정과 합리의 장을 되짚어 보다’에서는 이러한 당당한 조선시대 여성들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지난 10월 말부터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특별 전시되고 있는 ‘조선시대 재산상속기록, 분재기-공정과 합리의 장을 되짚어 보다’에서는 이러한 당당한 조선시대 여성들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1612년 11월 6일 이지영의 처 이씨는 사위 박의장에게 여자 종과 그의 후소생을 물려줬다. 사위가 평소 자신을 극진히 봉양하고 특별히 수연(壽宴·장수를 축하하는 잔치로 보통 환갑잔치를 이름)을 성대히 베풀어 준 것을 가상히 여겨 재산을 나누어 준 것이다. 이씨는 이와 같은 내용을 문서로 만들어 자신의 도장을 찍고, 증인으로 오촌질(조카)와 사촌손(손자)을 세웠다.

1543년 10월 4일 김종직의 아내 남평 문씨는 자녀들에게 노비와 전답을 상속하는 문서를 작성했다. 남편 김종직이 생전에 자녀들에게 재산을 나눠주지 않고 사망해 문씨가 분재한 것이다. 문씨는 본인의 자녀뿐만 아니라 김종직 전처의 두 딸에게도 노비와 전답을 균등하게 나누어 주었다.

‘칠거지악(七去之惡)’이나 ‘삼종지도(三從之道)’ 같은 말로 여성을 억압하던 조선시대에 위 사례처럼 독자적으로 재산권을 행사하는 여성들의 모습은 좀 낯설다. 하지만 17세기 이전, 조선 초기만 해도 여성들은 부모로부터 똑같이 재산을 상속받고 이 재산에 대해서는 독립적인 권한을 갖고 행사했었다. 이씨처럼 자신을 잘 봉양한 사위에게 노비를 선물로 주거나, 문씨처럼 남편을 대신해 집안의 모든 재산을 나누는 주체로서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지난 10월 말부터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특별 전시되고 있는 ‘조선시대 재산상속기록, 분재기-공정과 합리의 장을 되짚어 보다’에서는 이러한 당당한 조선시대 여성들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번 특별전에서 한중연 장서각은 소장하고 있는 분재기를 바탕으로 일부 기관의 자료 협조를 받아 70여 점의 분재기를 전시하고 있다.

분재기(分財記)는 재산을 소유한 재주(財主)가 토지, 가옥, 노비 등의 재산을 자손에게 나누어주며 기록한 문서로 당시의 생활상과 상속의 실상, 삶의 철학까지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1차 사료로 손꼽힌다.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분재를 법제화했고, 그 핵심은 ‘균분(均分·고르게 나눔)’이었다. 조선시대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에는 아들과 딸의 차별 없이 재산을 분배하고, 출가한 딸에게도 차별이 없도록 균분의 원칙을 적용하도록 하고 있다. 남녀에 상관없이 태어난 순서대로 재산을 자식들에게 균등하게 나누어 준다는 것이다.

또한 남녀의 재산은 철저히 따로 관리되고 분재됐다. 여성이 친정에서 가져온 재산은 처분권도 전적으로 여성 측에 있었고, 부인의 재산을 함께 상속할 경우에는 반드시 부부의 동의가 있거나 재주(財主)로서 부부가 나란히 서명했다. 또한 이 시대 여성들은 자기 몫의 부를 바탕으로 전답 및 노비의 매매와 상속 그리고 소송을 통한 재산권 확보에 적극적이었다.

1596년 3월 이경검 부부가 딸 효숙에게 가사(家舍)를 특별히 내려주는 상속문서에는 부부가 공동명의로 별급한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1594년 정경부인 안동김씨가 다섯 자녀에게 재산을 분재한 문서에는 양가 선조들과 남편의 묘를 잘 돌보고 제사가 온전히 이어질 수 있게 하라는 당부와 함께 친정 부모의 제사에 대해서도 각별히 당부하고 있다. 율곡 이이의 외할머니이자 신사임당의 어머니인 용인 이씨가 다섯 딸에게 남편과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 준 문서에는 제사를 위해 외손자에게 재산을 상속하는 모습이 나온다. 이를 통해 아들이 없는 경우 외손이 제사를 모시는 모습이 익숙했던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남녀 차별 없는 재산상속과 여성의 재산권 행사는 임진왜란 등 큰 어려움을 겪은 조선 사회에 성리학 중심의 새로운 사회질서가 뿌리내리면서 변화하기 시작했다. 장자 중심의 전통이 사회 전반에 정착되기 시작한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균분을 표방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조상의 제사를 모시는 자를 우대하는 과도기를 거쳐 남녀를 차별하고 장자와 차자를 구별해 재산상속이 이뤄지게 된 것이다. 1669년 김명열의 ‘전후문서’(일종의 유서로 대부분의 경우 분재기의 성격을 띠고 있다)에는 부모의 제사를 딸들은 배제하고 아들들만 번갈아가며 지내도록 하고 있다. 따라서 재산의 분배에서도 출가한 딸들에게 아들이 받는 유산의 3분의 1만을 지급하도록 결정했다.

 

이번에 전시된 조선시대 분재기를 통해서는 남녀평등의 균분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합리성도 들여다볼 수 있다. 분재에서 균분 원칙은 재산의 양뿐만 아니라 질까지 고려한 철저한 것으로 노비의 경우 성별은 물론 나이와 거주지, 심지어 지적 능력까지 고려해 균등하게 분배했다. 또한 분재는 노비와 전답, 가재도구 등의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서책 같은 지식자산까지도 대상에 포함됐다. 17세기에 정경의 반열에 올랐던 이관징은 학자에 대한 열망으로 손자인 이만부에게 숙종 임금에게 하사받은 사서오경을 비롯한 각종 서책을 상속했다. 훗날 이만부는 18세기 조선의 석학으로 성장했다. 뿐만 아니다. 공공성을 지닌 문화자산을 자신의 후손이 아닌 자신의 정신을 올곧게 전할 수 있는 사람에게 상속하기도 했다. ‘홍의장군’으로 알려진 곽재우가 1602년 영산 창암의 낙동강변에 강정(江亭)을 짓고 이를 후세 사람들까지 향유해야 할 사림의 문화공간으로 여겨 자손들이 아닌 영산의 선비 이도순에게 증여했다.

이처럼 당시 사람들의 생각과 철학이 담긴 분재기는 분재를 하는 과정과 내용을 통해 그 집안의 가훈을 엿볼 수 있다. 분재기는 재산을 상속하는 배경과 원칙을 쓴 서문, 자녀별로 나누어 준 토지와 노비 등의 내용과 그 수를 기재한 본문, 재주와 증인 등의 서명 부분으로 구분되는데 특히 서문 부분이 일종의 가훈의 성격을 띤다. 당시 분재 행위는 우선 조상을 모신 사당에 참배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가사를 자식들에게 넘기는 일종의 의례(儀禮)로, 단순히 재산을 후손에게 넘겨주는 경제적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 가문의 가범(한 집안의 예의범절)을 계승하는 과정이었다. 또한 분재 시 서자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도 돋보인다. 경국대전에도 양첩자녀(良妾子女)에게는 7분의 1, 천첩자녀(賤妾子女)에게는 10분의 1을 줄 것을 규정하고 있다.

조선시대 분재는 양반뿐만 아니라 양인과 노비에 이르기까지 재산을 가진 모든 이들은 시행할 수 있는 권한이었다. 양반처럼 재산이 많지 않은 상천민(常賤民)의 경우 균분 상속보다는 생계가 어려운 특정 자식에게 재산을 주거나 가족 간의 의를 중히 여기지 않는 자식을 상속에서 소외시키는 등 유연하게 재산 상속을 했다. 양반의 경우 노비와 토지를 중심으로 분재했지만 상천민들의 경우 재산의 규모가 작고, 소나 말, 식기 등의 가재(家財)를 주로 상속했다. 1540년 남자 종 복만은 두 딸에게 논밭과 기와집, 과일나무, 가마솥, 도끼 등을 나누어 주었고, 1608년에는 임씨 성을 가진 평민 여성이 자신의 자식 3남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면서 작성한 문서가 전해지고 있다. 이들도 양반들과 마찬가지로 분재기에 자신의 ‘서명’을 해 문서의 공신력을 획득했다. 남성들은 사인으로, 양반 여성들은 도장을 사용했고, 평민 여성들은 인장 대신 오른손을 그려넣었다.

참고문헌 : ‘조선시대 재산상속문서 분재기–공정과 합리의 장을 되짚어 보다’(한국학중앙연구원·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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