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20년 순회 콘서트, 30~31일 세종문화회관서 막 올라
노래하면서 처음 행복 느껴...힘들었던 만큼 내 노래엔 할 얘기 많아
등 굽고 주름 투성이라도 무대에 서고 싶어

 

국악, 대중가요, 재즈, 오페라의 경계를 넘나들며 때론 구슬픈 듯 애절하게, 때론 세상을 향해 벼락치듯 시원스레 내지르는 가수. ‘봄날은 간다’를 한없이 슬프게도, 더없이 즐겁게도 부르는 소리꾼 장사익(65)은 “노래란 즐거울 때는 즐거운 대로, 슬플 때는 슬픔을 어루만질 수 있는, 생활 속에 살아 있는 노래가 돼야 한다”고 말한다.

2년 전 임종을 맞은 외숙모님의 손을 잡고 한 시간 동안 낮은 목소리로 유행가를 불러주었던 그에게 외숙모는 “행복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떠났다. 이 세상의 어떤 물질과도 바꿀 수 없는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이 노래라는 해석이다.

데뷔 20주년을 맞아 10월 30~31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을 시작으로 12월 25일까지 울산, 대구, 광주, 대전, 부산, 김해 등 7개 도시에서 소리판 ‘찔레꽃’ 콘서트를 갖는 그를 만났다.

“천지가 개벽할 일이었지유~. 20년이 제겐 이틀 같애유.” 충청도 사투리가 이렇게 정감 있었던가. 입에 착착 감기며 구수하기까지 하다.

세상 풍파 다 겪고 45세에 데뷔한 그의 인생 역정은 많이 알려져 있다. 기자가 그를 처음 만났던 곳은 마지막 직장이었던 자동차정비업소. 인왕산·북한산·삼각산 등 서울의 산들을 그림처럼 바라보는 풍광 좋은 종로구 홍지동 그의 집에서 20여 년 만의 재회에 그는 자신의 용기 있는 변신을 ‘운명’이라 말하면서 흥분을 숨기지 않았다.

노래를 운명으로 여기는 것은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향 광천 뒷산에서 무서움도 모르고 웅변 연습하느라 5년간 소리 질러 목청을 틔우고, 선린상고 3년 2학기에 일찍 취직이 된 뒤에는 퇴근 후 낙원동 음악학원에서 노래를 배웠다. 작곡가 한동훈 선생에게 가요의 기본과 당시 유행하던 샹송 등을 3년간 배웠다. 군 입대 후엔 급수공병으로 복무하다 문화선진대 오디션에 합격, 제대할 때까지 노래를 불렀다. 제대 후 복직하려 했으나 회사가 인수합병돼 없어졌다, 이후 무역회사에 취직했으나 이번엔 73년 오일쇼크로 퇴사했다. 이후 짧게는 한 달부터 5년까지 그가 옮겨 다닌 직장이 10여 곳. 그 사이 장사도 해보았지만 실패만 따랐다. 가족에 대한 책임과 ‘밥벌이’를 위해 일하면서도 그가 놓지 않았던 것은 국악이었다. 동호회와 명인들을 찾아다니며 단소, 피리, 대금을 배웠다. 마지막 직장을 그만두고는‘진짜 해보고 싶은 일을 하겠다’며 남들은 쳐다보지도 않던 태평소에 목숨을 걸었다고 한다. 3년이면 프로가 돼 밥은 먹을 수 있으리라 믿었단다.

 

이광수 사물놀이패에 합류, 태평소를 불었다. 농악판 뒤풀이에서 불렀던 노래를 피아니스트 임동창이 듣고는 무대에 서보라고 권했다. 떠밀리다시피 나선 것이 94년 11월. 홍대 근처의 예극장.100석 규모의 소극장이었다. 그런데 초만원을 이뤄 이틀 공연에 800명이 들었고 매스컴에도 소개됐다. 2년 만에 터진 대박이었다.

“그동안 웃음이 없었던 지가 ‘이게 행복이구나’ 했시유. 제 입에서 ‘행복이란 단어가 그때 처음 나왔시유.”

그날 이후 그는 하루하루를 꿈꾸듯이 살았다고 했다. 세상은 살 만하고 모든 것이 고맙기만 했다. 빙 돌아온 지난 세월의 모든 것은 소리꾼을 위한 큰 거름이고 자양분이었다.

“노래라는 집을 짓기 위해 그동안 벽돌 한 장씩을 쌓았던 거지유.”

서태지, 김건모, 신승훈 등 20년 후배 가수들이 가요계 정상을 주름잡던 시기에 나타난 그의 데뷔는 신선했고 빛났다. 트로트풍 대중가요인지, 판소리인지, 재즈인지, 아리송한 창법에 긴 호흡, 애절함이 담긴 살짝 갈라지는 목소리는 삶의 굴곡을 그대로 담아 전해주었다. 듣는 이들이 모두 “저게 내 노래”라고 공감하는 노래를 불렀던 것.

장사익이 부르는 노래는 장르를 정확히 가늠하기 어렵다. 삶을 관조하는 영혼이 담긴 시에 운율과 고저 장단을 바꿔가며 낭송하듯 읊조리기를 수백 번 거듭한 끝에 나온 곡들이다.

“지는 작곡은 못 해유. 그윽한 시. 처음보다 몇 번 읽어야 맛을 느끼는 시어를 만나면 흥얼거리면서 이리도 불러보고 저리도 부르지유. 그래서 엮음이라고 해유.”

민요가 가미된 것이 있는가 하면 판소리 아니리에서 차용한 것도, 도니제티 오페라 사랑의 묘약 중 ‘남 몰래 흐르는 눈물’의 한 소절 같은 느낌이 나기도 한다.

충남 홍성역사에 걸린 박목월의 시 ‘나그네’를 중모리장단의 노래로 만든 것도, 김형영의 시 ’따뜻한 봄날’을 ‘꽃구경’으로 만든 것도 그렇다. 시어에 천착하는 것은 노래엔 긴 생명력을 주기 때문이다. 부르다 보면 모두 삶의 희로애락이 묻어나는 그런 노랫말들이다. 

8집 앨범에도 김춘수의 시 ‘서풍부’에 곡을 붙인 노래를 담았다. 그런가 하면 기존의 가수들이 발표했던 노래를 리메이크한 것들도 많다. 박자를 파괴한 긴 호흡으로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내는 것이 소리꾼 장사익의 매력이다.

젊은 시절 고단했던 삶을 경험한, 한(恨)이 실린 장사익의 노래가 고향과 어머니 생각이 들게 하고 눈물짓게 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여성팬, 특히 인생의 질곡을 어느 정도 겪은 ‘아줌마·할매 팬’이 유난히 많다. 고달픈 삶을 보듬어주고 먹먹하던 가슴이 뻥 뚫리는 후련함을 느낄 수 있어서다.

“아킬레스 같은 감성을 살짝 건드려줘야지유. 울고나면 시원하잖아유. 슬픔도 나누면 가벼워지구유.” 그는 노래가 아픔을 치유한다고 했다.

 

콘서트 후엔 꼭 사인회를 갖는 것도 응어리를 털어낸 팬들과의 만남을 소중히 여겨서다.

대전 콘서트에선 이런 일도 있었다. 아주머니, 할머니들이 늘어선 긴 줄에서 40분 이상 기다린 아저씨 한 분이 마침내 차례가 되자 “장 선생, 난 사인 필요없고. 당장 약 끊겠소!”라고 소리쳤다. 우울증 치료약을 복용하던 그이는 노래가 가슴의 병을 치료했다고 믿었다는 것.

소리꾼이 된 뒤 언젠가 어머니가 “점을 봤는데, 너는 기생 될 팔자라네”라고 했단다. 장사익은 그 얘기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나는 노래해서 즐겁고 다른 사람들 즐겁게 해주니 좋찮아유. 일어날기(起) 날생(生)이믄 분위기 띄우는 좋은 일이잖어유.”

데뷔 20년을 맞은 그는 이제 인생 3막에 들어섰다고 생각한다. 부모 그늘서 살던 30년, 가족을 위해 살았던 30년에 이어 이제부터 90까지 온전히 자신만을 위해 살겠단다.

“도(道) 닦는 게 뭐겠이유? 내 길 찾는 것이지유. 꿈 찾아서 제대로 가는 것이유. 노래하면서 춤추면서 사는 것이유. 죽을 때까정 노래하면서 가고 싶어유. 힘이 떨어지고 기술은 떨어지더라도 나이 들수록 할 얘기는 많아지고 울림도 깊고 넓어질 거예유.”

장사익은 가끔 허리 굽은 ,주름 투성이 노인이 무대에 올라와 쉰소리로 책 읽듯 노래하는 꿈을 꾸기도 한다.

30년 뒤의 큰 꿈을 이루려면 “오늘, 하루하루, 소소한 것들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다짐한다.

“제 공연엔 여유 있고 풍요로운 분들보다 힘들고 어려운 분들이 많이 와유. 그분들은 ‘갈까 말까’를 100번 이상 생각해서 오는 것이에유. 그런 분들이 공연 한번 보시고 만족할 수 있게 해야지유.”

7남매의 맏이로 태어나 집안의 ‘기둥’이어야 한다는 책임감도 막중했다. “무슨 일을 하든, 성공하라”며 잘 풀리지 않던 아들을 격려했던 아버님이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 세상 떠난 것을 두고 “그나마 효도했다”고 했다. 그의 노래 속에 절절함이 묻어나는 것은 과거에도 현재도 진솔함을 잃지 않아서다.

장사익은 국악 가족이다. 대금을 연주하는 두 아들은 국립극장과 정동극장 단원으로, 가야금을 연주하는 큰며느리는 안산시립국악단에서 활동하고 있다. 둘째 며느리는 한국무용 전공자다.

‘좋은 소리가 항상 살아 있는 내 집, 이곳이 정말 천국이다’라는 글귀가 있는 거실에는 인터뷰하는 내내 창밖의 풍경 소리와 낮게 깔리는 라디오의 음악이 이어지고 있었다. 오래도록 여운이 공명하는 종이 있었고 마당에선 졸졸 흐르는 계곡 물소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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