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피나.
영화 '피나'. ⓒ네이버 영화

고백하자면 나는 무용에 대해 문외한이다. 기껏해야 지젤이나 백조의 호수를 보고, 스스로를 몸치라고 생각해서 그 흔한 말춤 한번 춰 본 적이 없고 아는 춤도, 따라하는 춤도 없다. 춤은 내겐 너무 먼 꿈이고, 너무 지나친 관능이고, 뻘쭘한 예능이었다. 그런데 영화 ‘피나’에 나오는 주인공 피나 바우슈를 보고 생각이 달라졌다. 공장에서 지하철 안에서 수영장에서 춤을 추는 무용수들을 보며 마음이 바뀌었다. 내가 매일 말하는 언어가 혀의 춤이고, 아침마다 하는 양치질이 이를 위한 기계적 무용이라는 것을 피나는 부드럽게 깨우쳐 준다.  

피나 바우슈는 말한다. “나는 인간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보다, 무엇이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가에 더 관심이 있다”고. 감독 빔 벤더스의 손에서 3D로 구현된 피나의 춤은 현실의 고통과 괴로움, 두려움과 불확실성, 심지어는 성적인 면까지 가감 없이 모두 드러낸다. 마치 ‘현실에서는 어렵지만 무대에서는 무엇이든 가능해’라고 관객의 귀에 속삭이는 것 같다. 무용수들은 피나 바우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피나가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조용히 테이블에 앉아 무용수들에게 ‘좀 더 미쳐야 돼’라고 일순간 말을 던지면, 그 짧았던 말이 평생의 화두가 됐다고. 

‘봄의 제전’ ‘카페 뮐러’ ‘콘탁트 호프’ ‘보름달’ 등 다큐멘터리 속 무대에서 무용수들은 마음으로 상처받고 피 흘리는 우리의 몸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마치 그리스의 4원소론을 떠올리듯이, 흙과 물까지도 무대장치의 일부로 받아들인 후, 중력에 저항하는 인간의 몸부림을 그림 그리듯 표현해 낸다. 피나 바우슈의 춤을 통해 춤이야말로 죽음의 사슬에서 끊임없이 도망하려는 인간의 지난한 몸짓이라는 것을. 그 악착 같은 몸짓이야말로 살아 있는 것의 모든 것. 그 모든 것의 모든 것임을 깨닫게 만든다.   

그래서 피나 바우슈의 삶과 무용에서 강렬한 사랑과 욕망, 극심한 불안과 공포, 상실과 고독, 가슴을 에는 슬픔과 고뇌를 느낀다. 그것은 에너지 그 자체다. 필자가 한국에서 피나 바우슈 무용단의 ‘보름달’을 보았을 때 느꼈던 것은 원시적 생명력으로 약동하는 미친 인간의 몸짓이었다. 그것은 지극한 아름다움이기도 했다. 사랑받고 자신을 내밀고 다시 거부당하고 언제나 다른 사람들과 무엇인가 연관이 돼 있는, 우리 안에서 늘 시계처럼 째깍이는 감정들. 그것을 몸의 뿌리 마디마디에서 느끼게 하는.   

피나 바우슈의 통합적이고 통섭적인 무용극에서 춤, 연극, 노래, 미술의 모든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을 통렬하게 목격했다. 움직임과 음악을 연결시키는 안무된 춤이라는 절대 논리에 일격을 가한 무용의 역사를 목도하게 된다.   

언젠가 피나 바우슈가 살았고, 춤췄고, 가르쳤고, 죽어갔던 그 도시 부퍼탈에 꼭 가보고 싶다. 수영장에서도 하늘을 나는 지하철 안에서도 자유로이 춤을 추었던 무용수들의 발걸음을 종종걸음으로 뒤따라가 보려 한다. 그곳에서 우리의 살과 몸을 통해 우리에게 영혼을 보는 법을 가르쳐준 피나 바우슈의 눈을 느껴보고 싶다. 그리고 나 역시 춤추련다. 모든 일상의 행위들을 느끼고 맛보련다. 피나 바우슈가 허문 그 경계 위에서라면 어떤 움직임도 춤이 될 수 있을 테니까. 밤마다 내가 하는 수영조차 물의 춤. 물이 꿈꾸는 춤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아름답고 황홀했던 피나 바우슈의 춤사위. 왜 알모도바르가 자신의 작품 ‘그녀에게’에서 그녀의 춤 마주르카 포고(Masurca Fogo)를 영화 맨 앞에 삽입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그러니 하늘나라에서 부디 영면하소서. 당신의 빛나는 유산은 이제 세계인의 심장에 새겨지리니. 부디 하늘나라에서도 그 부서질 듯 가녀린, 그러면서도 힘찬 춤사위 멈추지 않을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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