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멜리. 짧은 단발에 빛나는 눈. 숟가락으로 단단한 파이 껍질 깨기와 곡식 자루에 손 집어넣기가 취미인 여자. 혀 끝에서 또르르 말리는 이름 아멜리. 아멜리는 태어날 때부터 특별한 아이였다. 1973년 9월 3일 오후 6시28분32초, 1분에 1만4670번의 날갯짓을 하는 나비가 파리 몽마르트 언덕 위에 사뿐히 내려앉은 그 순간, 수천만 분의 일의 확률을 뚫고 한 개의 정자가 난자와 만나 아멜리가 태어났다.    

몽마르트의 작은 카페에서 일하는 것은 어떨 것일까? 심기증을 앓는 조제트, 손가락 꺾기를 좋아하는 지나. 지나가 어떤 남자와 사귀는지 감시하는 조셉. 그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취향과 생의 무게를 조금씩은 가지고 있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다. 아멜리는 서서히 그들을 바꾼다. 마치 투명 망토처럼. 지나가는 맹인에게 길거리의 풍광을 설명하고, 조제트와 조셉을 엮어주고. 아멜리는 그 모든 것을 비밀스럽게 누구도 모르게 진행한다.    

그래서 마침내 영국 다이애나비가 교통사고로 죽던 날, 구슬과 장난감 군인과 빛 바랜 사진이 담긴 40년 된 낡은 보물상자를 아멜리가 주인에게 몰래 돌려주었을 때, 난 보았다. 늙은 남자의 얼굴에서 지나온 유년의 기억이 물밀 듯이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것을. 그 일로 그는 자신의 딸과 화해하고 손자를 품에 안을 수 있었다. 사실 인간이란 고통 아니면 기쁨에서 무언가를 배우는 법. 그런데 아멜리는 정말 드물게 기쁨 속에서 인생을 배우는 법을, 나누어 줌으로써 더 커지는 행복이란 비밀의 문을 열었던 주인공이다.  

그런 아멜리에게도 사랑이 찾아온다. 즉석 사진기의 찢어진 사진을 모으는 니노를 사모하는 아멜리. 니노가 못 알아보자 상심 끝에 물처럼 흘러내리거나, 그를 만나자 심장이 야광으로 두근거릴 때.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기쁨도 아픔도 오직 가까운 사람,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겪을 수 있는 거라는 것을 아멜리는 보여준다.  

 

그래서 아멜리를 기억하면 온통 스크린을 적시던 녹색의 광채가 떠오른다. 밤 장면이 거의 없이 찬란한 낮만 계속될 것 같은 파리의 구김살 없는 푸르디푸른 투명 광선이 생각난다. 그러곤 깨닫는다. 살아 있는 건 좋은 것이다 정말. 영화에서 아멜리 같은 캐릭터를 만나는 것도 정말 좋다. 왜냐하면 아멜리의 또 다른 이름은 행복이니까. 

사실 주변의 사람들은 아멜리를 만나기 이전엔 그리 행복하지 못하다. 아멜리와 친하게 된 이웃집 노인 레이몽은 하루종일 르누아르의 그림만 20년 넘게 반복해서 그렸다. 게다가 아멜리의 어머니가 죽은 후 아버지는 어머니의 유골함과 함께 늙어간다. 시시포스처럼 반복되는 무의미한 일상 속에서 상실이라는 불행의 전령들을 마주친 사람들. 나 같으면 말 한마디 붙이지 못했을 것 같은 이들에게, 아멜리는 기꺼이 그림 속 소녀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전 세계를 배경으로 한 난쟁이 사진을 비밀 배달한다.    

한 번이라도 시장통에서 그녀, 아멜리를 만나보고 싶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수줍고 내향적인 아멜리에게 먼저 손을 내밀 수 있을까? 나는 아멜리의 수줍음을 그저 자신감 없음으로 착각한 것은 아닐까? 아멜리는 증명사진(Photomaton) 속 인물의 수다가. 의자의 고집스런 침묵이나 탭댄스를 추고 싶어하는 냉장고의 마음을 느낀다. 기르던 물고기 카차롯이 신경쇠약으로 자살을 시도한 것을 알고, 그림 속 동물들이 논전을 벌이는 것을 듣는다.  

언제나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세상을 관찰하며 자기 자신만의 호기심에 따라 주변 사람들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아멜리. 언젠가 파리에 다시 간다면, 아멜리가 근무했던 몽마르트 카페에 꼭 들를 것이다. 거기서, 나는 커피를 마시리라. 그날, 그저 환하게 미소만 짓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멜리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 인생에 환한 비밀의 햇살이 살포시 스며들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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