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 감독이 그린 솔 메이트 소녀들의 성장통

소녀는 어찌해서 어른이 되어 가는가? 영화 ‘진저 앤드 로사’의 주인공 진저에게 옆집 아저씨는 이렇게 말한다. “소녀로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고. 진저와 로사가 공원의 놀이 기구를 타자 세상은 뱅뱅 돌아가기 시작한다. 항상 엄지를 치켜들고 히치하이킹을 해야 하는 두 소녀는 아직은 세상을 돌아다닐 도구를 갖지 못했다. 그래도 진저는 한날 한시에 태어난 로사를 솔 메이트로 굳게 여기고 있다. 

나란히 그네에 앉아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접착된 소녀들 사이를 갈라놓는 것은 핵전쟁 위기가 발발할지도 모른다는 1960년대의 시대적 공기와 늘 자유주의자로 살기를 원하는 진저 아버지의 등장이다. 진저는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시위에 참여하고, 시를 쓰며, 사회적 변화에 민감하게 대처하지만, 어렸을 적 아버지가 떠난 로사는 영원불멸의 사랑을 갈구한다. 진저를 데려다 주며, 거울 속에 비친 롤란드의 모습과 로사의 모습을 번갈아 잡는 감독 샐리 포터의 미장센은 장차 두 사람 사이에 있을 관능적인 관계를 이미 예견하고 있다.  

진저의 아버지 롤랜드는 10대 시절 이미 한 여자를 임신시켜 화가가 되고 싶어했던 그녀의 꿈을 좌절시켰다. 작은 보트에서 기거하며, 슈베르트의 ‘네 손을 위한 판타지’를 듣고는 울어버린다. 아빠라고 부르는 것이 싫다며 딸에게 롤랜드로 불러달라고 부탁하는 이 사내. 누구의 이야기조차 듣지 말라며, 심지어 자신의 이야기조차 듣지 말라고 딸에게 미소 짓는다. 롤랜드란 사내는 세계를 감금과 구속이라는 테마로 보고 있으며, 로사의 뒤에 걸려 있는 그림이 상징하듯, 로사를 불가항력의 세이렌이라고 여긴다. 그러므로 진저에게 아버지의 작은 보트는 세상의 종말로 가는 노아의 방주 같은 것이나, 로사에게 이 보트는 로맨스와 감성이 피어나는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다. 

뛰어난 페미니스트 감독인 샐리 포터는 오직 진저의 입장에서 핸드헬드 기법으로 한 소녀가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우정, 배신, 신념의 충돌과 소멸, 용서와 화해의 문제를 아우른다. 진저는 갑갑하고 지루해 보이는 어머니와 지나치게 이기적이고 자기 모순적인 아버지 사이에 끼여 있다. 마치 이성의 세계와 감성의 세계에서 극도의 혼란을 느끼는 모든 사춘기 소녀를 대변하는 듯하다. 진저와 로사가 함께 담배를 피우며 서로를 느끼는 공간은 이스트런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공터와 그곳에 세워진 커다란 새장 같은 곳이다. 게다가 영화는 핵 전쟁 이후 폐허의 이미지로 시작한다. 소녀들에게 가해지는 알 수 없는 미래의 불안감과 상통하는 불협화음이 재즈의 선율과 함께 넘쳐난다.     

진저의 아버지는 프로이트가 말한 ‘여성은 검은 대륙’이라는 이론을 수용해 진저의 본명을 아프리카로 지어 주었다. 이 상징적인 이름처럼, 진저는 자신의 처지에서 벗어나려 처절하게 투쟁하고 쓰디쓰게 고통을 당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로사의 사랑과 임신을 비밀로 했던 소녀는 마침내 폭발 직전의 신경쇠약을 겪는다. 비밀의 누설은 곧 진저에게는 세계의 종말이나 다름없고, 그리스 원형극장에 모인 배우들처럼 모든 이들이 로사와 롤랜드의 비밀을 알게 된다. 진저의 어머니는 음독자살을 감행한다. 

분명 롤랜드와 공통점이 많고, 롤랜드를 이해한다고 말하는 로사는 사랑의 마법에 빠져 뭔가를 착각하고 있다. 로사의 어머니도 롤랜드에게 파이를 만들어 주다 울었고, 스파게티를 만든 로사도 이윽고 그럴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진저는 로사에서 용서한다는 편지를 쓴다. 미래에 관한 시. 어찌됐든 너를 용서할 것이라는 시. 진저의 아버지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지만, 쓰고 용서하고 세상을 다시 보는 쪽은 오히려 진저다. 진저 역을 맡은 엘르 패닝은 깊고 푸른 두 눈 속에, 사랑하는 이들의 모순을 통해 성숙해져 가는 사춘기 소녀의 역할을 멋지게 해내고 있다. 로사 역의 앨리스 엔글레르트는 호주의 여성 감독 제인 캠피온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