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에 대한 고민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죠”

한국 여성 아나운서들의 방송 수명은 그리 길지 않다. 나이를 먹을수록 활동 영역이 좁아진다. 결혼과 출산, 육아가 발목을 잡고, 방송국은 젊은 아나운서를 선호한다. 보여지는 이미지를 중요하게 여기는 탓이다. 머리가 희끗한 아나운서들이 메인 뉴스를 진행하는 건 외국 사례일 뿐이다. 

KBS 공채 18기로 입사한 정용실(46·사진) 아나운서는 KBS에서 몇 안 되는 중견 여성 아나운서다. 그는 현재 TV와 라디오를 종횡무진하며 활동하고 있다. 특히 대담 프로그램 KBS 1TV ‘한국 한국인’, 지난해 종영한 ‘즐거운 책읽기’ 등 교양 프로그램에서 전문성을 인정받고 있다. 

정 아나운서는 1994년 입사 3년 만에 한창록 프로듀서와 결혼을 하고 출산 후 일·가정 양립이라는 어려움에 부닥쳤다. 육아의 일차적인 책임은 여자였고, 남편은 도와주는 존재일 뿐이었다. 난생처음 성차별을 받는다고 느낀 그는 그제야 자신이 여성이라는 걸 자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여성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90년대만 해도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여성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았어요. 방송의 기회를 가질 수 없었을 때 방송사 입사를 준비하면서 좌절한 순간보다 백배는 더 힘들었어요. 제가 평등한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더 발끈했는지도 몰라요.”

해결점을 찾기 위해 정 아나운서는 대학에서 여성학 공부를 시작했다. 여성에 대해 제대로 알고 공부를 해야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꽃처럼, 그림처럼 옆에 서 있는 여성 진행자가 아닌 새로운 여성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꿈도 가지게 됐다. 쉽지는 않았다.

“여성학을 공부하고 나서 삶의 태도가 달라졌어요. 불평만 하고 걸림돌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넘어설 능력을 키우자고. 제 가치관과 괴리되게 살고 싶지 않아 고군분투하며 살았죠. 류현순 KBS 부사장이 이전에 말한 일·가정 양립 노하우에 대해 공감해요. 저도 아이가 슈퍼마켓이나 문구점에서 물건을 사면 나중에 결제하는 법도 해봤죠. 엄마들은 슈퍼마켓 주인 분들과 친해야 해요. (웃음)”

방송으로 복귀한 그는 KBS 2TV ‘주부, 세상을 말하자’를 통해 주부 프로의 대표 여성 아나운서로 자리매김했다. 당시 사회 전반의 이슈를 ‘여성의 눈’으로 진단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대안적 프로그램으로 정착시켰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았다. 이 프로그램으로 ‘미래의 여성지도자상’을 수상했고 2007년 여성가족부가 선정한 대표 멘토로 위촉받기도 했다.

그가 강조하는 것 중 하나가 ‘책’이다. 그 자신을 만든 토대가 ‘여성’이라면 ‘책’을 통해 뿌리를 단단히 내렸기 때문이다. 방송인으로 첫발을 내디뎠을 때 기본기가 부족했던 그는 책을 읽었다. 아나운서로 필요한 한국어 실력이나 말, 어휘 등을 책에서 보고 노트에 기록하는 일을 계속해왔다. 지금도 문제에 봉착하면 비슷한 종류의 책을 사서 읽는다.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상당해요. 그래서 ‘책’을 좋아하는 건지도 몰라요. 특히 소설에는 수많은 사람의 이야기가 있죠. 엄마라는 것이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아이를 낳았을 땐 제 또래 여성 작가들의 소설을 찾아 읽었어요. 수많은 여성 주인공들을 통해 결혼이 무엇인지, 아이라는 존재는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됐죠. 지금은 영화 ‘피나’로 잘 알려진 현대무용가 피나 바우슈에 대한 책을 읽고 있어요.” 

여성의 경력단절 개선 방안에 대해 논의가 활발한 요즘, 정 아나운서는 이를 주의 깊게 본다. 종종 강연을 통해 만난 경력단절 여성들이 상담을 요청해오기도 한다.    

“아이들의 교육 문제에 대해 질문을 하던 여성분들이 결국에는 자기 자신에 대해 고민을 요청해 와요. 저는 그들에게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말해요. 자신감을 얻고 인생을 바꾸는 데 책만큼 좋은 게 없거든요. 책을 읽는 것도 하나의 ‘작은 성취’죠. 수많은 여성 작가들은 자신의 부엌에서 글을 썼어요. 책을 읽고 블로그에 서평을 올려도 되고, 동화구연을 해도 되고요. 요즘에는 1인 창업은 물론, 할 수 있는 게 많잖아요. 욕심을 부리지 않고 자신이 관심 있는 작은 것부터 시작할 수 있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최근 정 아나운서는 ‘여성’ 그리고 ‘책’이 결합된 자신의 23년 방송생활을 발판으로 ‘혼자 공부해서 아나운서 되기’를 발간했다. 2000 대 1에 맞먹는 아나운서 입사 경쟁률. 현장을 떠나기 전 조금이라도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저만의 노하우를 정리해봤어요. 일종의 매뉴얼이라고 봐요. 워낙 문이 좁기도 하고 희귀 직종이다 보니 주변에서 ‘안 팔릴 책을 왜 썼어?’라는 농담도 들었어요.(웃음) 하지만 책 한 권 값으로 누구에게나 기회를 주고 싶었어요. ‘혼자’라는 말을 붙인 이유는 아카데미에만 의지해서 주체성을 잃지 말라는 뜻이기도 해요.”

정 아나운서는 아나운서 멘토링을 시작할 때 ‘꿈의 3지망’을 적어보라고 권한다. 오로지 아나운서 한 분야만을 도전해 다른 길을 놓친다는 건 ‘무모한 일’이라 본다. 인생이 원하는 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에 내린 결론이다. 

“아나운서는 되기도 어렵지만, 기억에 남는 아나운서가 된다는 건 더 어려운 일이에요.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서 방송을 하고 싶어요. 미래에 무엇이 되려고 하기보다는 현재에 충실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