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이혼 문제 대두…‘해로하시라’ 기각 판결에 여성계·시민단체 들끓어
여성신문 ‘여성인권보호 지원사업’ 시작

 

이시형 할머니 사건은 황혼이혼이 사회쟁점화되는 발단이 됐다. 여성신문은 황혼이혼 문제를 여성인권 차원의 문제로 끌어올리는 한편 이 할머니 돕기 후원구좌를 개설해 사회 각계각층의 힘을 보태는데 통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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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형 할머니 사건은 황혼이혼이 사회쟁점화되는 발단이 됐다. 여성신문은 황혼이혼 문제를 여성인권 차원의 문제로 끌어올리는 한편 이 할머니 돕기 후원구좌를 개설해 사회 각계각층의 힘을 보태는데 통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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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신문

1998년 이시형(70) 할머니 사건은 황혼이혼이 사회 쟁점화되는 발단이었다. 그해 9월 서울가정법원 가사합의 3부(담당 김선중 부장판사)는 이 할머니가 남편 오현호(90) 할아버지를 상대로 낸 재산분할 위자료 청구 이혼소송을 ‘해로하시라’는 단순한 논리로 기각 판결했다. 이에 여성신문은 이 할머니를 밀착 취재해 이혼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절박한 상황을 알렸다. “내일 죽더라도 오늘 이혼하고 싶다”는 제목의 표지 기사는 이혼 기각 판결의 부당성을 입증함과 동시에 황혼이혼 문제를 여성인권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됐다.(1998.10.2, 제494호)

이 할머니는 전쟁미망인으로 북에서 내려온 오 할아버지와 만나 29세에 결혼했다. 가부장적인 남편과의 40년 결혼 생활은 ‘창살 없는 감옥’이었다. 남편 명의로 된 재산 형성에 공로가 있음에도 경제권을 박탈당했고, 종교의 자유도 없었다. 아들과 며느리 앞에서 폭언을 듣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94년에는 무일푼으로 남편에게 쫓겨나 떠돌이 생활을 전전했다. 95년 첫 이혼소송을 낸 할머니는 97년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한마디도 없이 일방적으로 고려대에 전 재산을 기증하자 두 번째 이혼소송을 감행했다. 그러나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재판 결과는 할아버지의 승리였다. 당시 할머니는 미국으로 간 아들과 주변 친지의 도움으로 전세 1800만원의 지하 셋방에서 어렵게 생활하고 있었다. 

할머니의 사연을 알게 된 여성계와 시민들은 분노했다. 사회 각계각층에서 할머니 ‘이혼시켜드리기 운동’이 일어났다. 여성신문도 ‘여성인권 보호 지원사업’을 시작했다. “노년에 가서야 이혼을 제기하게 되는 ‘황혼이혼’은 여성의 마지막 자기주장으로 더 처절한 인권의 외침이다”는 전제 아래 이시형 할머니 돕기 후원 계좌를 개설해 모금에 나섰다. 서울여성의전화는 본지와 연대해 이혼소송 문제점을 사회 이슈화하고 이 할머니가 승소할 수 있도록 재판부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1998.10.23, 제 497호)

MBC라디오 ‘화제집중, 전화를 받습니다’ 생방송에선 이혼이 성사돼야 한다는 전국 청취자들의 의견이 쏟아졌다. “여자이기에 그 양반 돌아가실 때까지 참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법원이 이혼을 성사시켜 젊은 사람들이 폭력과 외도를 일삼으면 끝이 어떻다는 것을 교훈으로 보여줘야 한다” 등의 목소리가 나왔다.(1998.12.18, 제505호)

당시 박원순 참여연대 사무처장(현 서울시장)은 하승수‧이상훈 변호사와 공동변호인단을 구성해 이 할머니의 항소심을 무료로 도왔다. 사회적 불씨를 일으킨 여성신문의 보도와 전 국민의 뜨거운 관심과 지원에 힘입어 2000년 9월 재산분할 3분의 1, 위자료 5000만원이라는 대법원의 첫 황혼이혼 승소 판결이 나왔다. 이 사건으로 황혼이혼은 해마다 급증, 통계청 조사 결과 지난해 이혼한 부부 4쌍 중 1쌍이 황혼이혼인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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