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은 여성을 위한 법과 예산이 구체적으로 실현된 해다. 15대 총선에서 역대 최고의 여성의원(전국구 7명, 지역구 2명)이 배출되고 여성발전기본법이 본격 시행됐다. 여기에 새해 예산 여성발전기금 1백억 원이 책정되면서 표면적으로는 여성의 권익증진을 향한 움직임이 두드러졌다. 여성신문은 이 기세에 힘입어 성평등 부부에게 수여하는 ‘평등부부상’을 자리매김하기 위해 박차를 가했다. 94년 ‘세계 가정의 해’를 맞아 본사와 정무2장관실이 제정한 이 상은 가족 내 자리잡은 가부장적인 문화를 개선하는데 목적을 뒀다.
평등부부상 선정은 심사부터 개념 정의까지 쉽지 않았다. 여성신문은 위험성을 줄이기 위해 대상 부부들을 직접 만나 대화의 자리를 마련했다. 심사기준은 △아내의 지위가 남편과 평등하다고 인정되는 증거 △평등 측면만이 아닌 조화와 협동(가사분담, 육아) △재산관리 및 자아실현 △부부가 가족과 사회에 대내외적으로 기여한바 등 4가지로 정했다. (1996년 7월 5일 382호)
심사를 위해 만난 남편들의 열린 사고방식, 성역할의 고정관념 탈피 등의 모습은 심사위원에게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96년 제2회 ‘평등부부상’을 수상한 7쌍(본상 5쌍, 장려상 2쌍)의 인터뷰와 생활상은 연이어 신문지면을 장식했다. 이들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경험했다. 가부장적인 환경에서 평등부부상이란 개념을 받아들이기 힘들 사람이 많았다. 많은 남성이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는 고리타분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부부의 개념이 변화고 있었다. 시대의 요구였다. 열린 사고로 부부의 개념을 제대로 정립해 나가는 남성들이 많아지고 있었다.
당시 결혼 8년차 부부였던 김광수‧정채진 씨는 결혼직후인 1985년부터 성남시 은행동에서 도시 빈민선교활동을 하며 가출 청소년들을 돌봤다. 이들은 가사나 육아분담, 경제권 공유 등 부부 사이의 평등뿐만 아니라 아이들과도 평등한 관계를 보여주는 점이 이목을 끌었다. (1996년 2월 9일. 2월 16일 361호, 362호)
결혼생활 28년째인 유재건(당시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김성수(주부) 부부는 기존의 남녀 역할을 고집하지 않았다. 본인이 하고 싶은 일, 적성에 맞는 일을 의논해 나눠 집안일을 했다. 또 매일 같이 기도하며 그 날 있었던 일을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 습관화 되어 있었다. 유 부총재는 “각자의 역할 분담과 서로 측은히 여기는 마음 갖기, 부부간 상호 장점을 격려해주고 부추겨주는 일은 가정의 생동력을 제공해준다”고 전했다. (1996년 6월 14일, 379호)
재산권을 공동분배 한 부부도 있었다. 부부공동재산제는 혼인 후 가사와 육아를 전담하는 여성의 지위를 보여주는 지표다. 김영식(당시 어린이전문서점 운영)‧최숙희(주부)씨는 아파트는 아내 명의로 서점은 남편 명의로 해놓는 등 재산권 공유 원칙에 철저했다. 이들 부부는 “아이들에게도 밥하기 빨래하기, 청소노동이 꼭 내일 네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일이라는 것을 심어준다”며 “서로의 일을 존중하며 동반자적인 부부가 되는 것이 평등의 길이 아닐까 생각된다. 가족신문 가족회의, 가족 공동체모임 등이 확산되어 남녀 차별없는 행복한 가정 문화가 정착됐음 한다”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신수영(당시 택시기사)‧이복순(가내부업 미싱사) 부부 역시 결혼 8년만에 마련한 집을 부부공동명의로 등기, 저금통장 등 모든 재산을 공유했다. (1996년 2월 2일 360호 보도)
당시 심사를 맡은 전택부 YWCA명예회장은 “평등부부상 제정은 부부 평등을 장려하는 프로그램으로 의미 있다”고 전했고, 김선호 고등교육재단이사는 “누가 진정한 평등부부인가를 고르는 것은 자기 자신이 다년 간 살아보거나 관찰 해 보지 않는 이상 어렵다. 오히려 관공서의 장이 추천하는 것보다 가까운 사람들의 솔직한 증언이 도움이 됐다”라며 “중요한 것은 평등사상이 얼마나 습관화 되어있는지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성평등의 시작은 가족 내 부부에서 시작된다. 가족 내 성평등은 가부장적 틀을 깨고 생활 속 양성평등을 자리를 잡는 기초다. 부부평등상은 불평등 부부들에게 부부의 역할모델을 되돌아보게 하는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20여 년이 흐른 2014년. 첫 여성 대통령이 당선된 지 1년. 부부간의 성평등에 이어 한국의 성평등 수준은 발전했을까. 지난해 10월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성 격차지수’에 따르면, 한국의 성 평등 순위는 136개국 중 111위로 매우 저조했다. 오히려 2012년(108위)보다도 하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