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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동에 자리한 ‘한국여성정치연맹’사무실을 찾았다. 정치계의

여성원로들이 꾸려가는 단체의 사무실은 의외로 소박한 모습이었다.

‘정치연맹’ 총재라고 하면 우락부락할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조용

하게 생긴 자신을 보고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며,‘정치’에 대

한 고정관념들을 여전히 갖고 있는 게 문제라는 김현자(71) 총재. 그

는 우리나라 초기 여성운동을 주도해 왔던 YWCA에서 오랜 활동으

로 여성운동가로서의 길을 걸어 왔고, 후배 여성정치인 양성과 여성

들의 정치의식 확산을 위해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성장기 남아선호에 대한 반감

YWCA 여성운동으로 표출

1928년 그는 전북 김제에서 태어났고, 익산에서 초등학교와 여학교

를 다녔다. 그는 네 자매 중 둘째딸이다. 딸밖에 못 낳았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늘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야 했던 어머니를 보면서, 그에

대한 반발심을 가지고 자랐고, 후에 그것이 여권운동에 뛰어들게 한

배경이 되었다고. 다행히 딸들에 대한 아버지의 교육열만은 높아 공

부 잘하는 둘째딸을 당시로선 드물게 대학까지 보내주었다. 그는 서

울로 올라와 이화여대 영문과에 진학해 처음 대학생활을 하면서 문

화적 충격을 경험했다.

“완전히 별천지였어요. 여자가 총장을 하지 않나, 교수도 여자들이

고... 여성들의 활발한 사회활동을 보고 충격적이었어요. 시골에서 여

성들이 차별받고 사는 것만 보다가 여자들도 이렇게 살 수 있구나

하는 것에 대해 눈을 뜬 거죠.”

그는 재학중 대학YWCA의 회장을 맡았고, 그것을 계기로 Y와는

반세기가 넘는 인연을 맺게 됐다. 49년 졸업을 한 후 YWCA의 제

안을 받아들여 YWCA연합회 수습간사로 들어갔다. 그때 그는 자신

의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한 사람을 만났다. 미국YWCA에서 활동

을 하다 한국에 고문으로 파견온 박에스더 선생이다.

“그 분을 통해 YWCA가 뭔지 제대로 알 수 있었죠. 그리고 친구

한 명과 저를 미국에 유학 보내, YWCA에서 훈련을 더 받을 수 있

도록 계획하셨어요. 미국 유학에 필요한 모든 서류 준비가 끝난 날

이 바로 50년 6월 24일이었어요. 기가 막히게도 전쟁나기 바로 전날

이었죠. 전쟁이 나자 미국 국적인 박 선생님은 본국으로 귀국하고,

나는 사흘 걸려 어렵사리 고향으로 내려갔죠.”

얼마 후 국군이 북진하기 시작해 익산은 다시 탈환됐고, 그즈음 그

는 모교인 이리여고의 영어교사 제의를 받았다. 교사 취임식이 있던

날, 우연히 들른 우체국에서 그는 미국으로부터 날아든 편지 한 장

을 발견했다. 미국과 편지 왕래가 재개됐다는 소식에, 주소도 없이

그저 미국 뉴욕 YWCA라고만 써서 반신반의하며 보냈는데, 박 에

스더 선생에게 답장이 온 것이다. 편지에는 초청장과 장학증서가 동

봉돼 있었다. 미국에서 초청받아 유학을 가겠다는 그의 말에 아버지

의 반대가 심했지만, 며칠간 울며불며 가야 한다고 우기는 딸의 뜻

을 막을 수 없었다. 드디어 51년 봄 그는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미국YWCA의 장학금을 받아 콜롬비아대에서 1년간 종교교육을 공

부하고, 대학생 간사로 일하기 위해 Y의 훈련을 받았다. 2년 만에

귀국해 그는 이화여대 강사를 하면서, Y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71년

에는 세계YWCA 실행위원으로 당선돼 국제활동을 시작했다. 8년간

실행위원을 지내면서 그는 국제적인 안목을 갖게 됐고, 여성문제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됐다고.

YWCA의 활동이 바로 여성운동이었던 시절, 그는 Y의 여성문제

이슈화에 많은 여성들과 함께 했다. 50년대 Y는 혼인신고를 하지 않

아 사실혼이 인정 안 돼 억울하게 당하는 여성들이 많아 혼인신고운

동을 벌였고, 이와 함께 남성들의 축첩제 반대운동을 벌였다. 60년대

는 버스 안내양들을 상대로 성폭행 등 비일비재했던 인권유린을 고

발하는 운동을 펼쳤다. 노동자운동이 활발하던 70년대는 노동조합

여성조합원들을 지원하기 위해 정부와 관계당국에 호소하는 일을 했

고, 기생관광문제도 이슈화했다. 그리고 이사로 있던 이태영 선생을

중심으로 1차 가족법 개정운동을 벌이는 등의 활동들이 있었다.

국제활동 경험 살려

여성정책 입안

50을 넘긴 나이로 연세대 교육대학원에 진학해 공부를 다시 시작하

고 있던 중 계획에도 없던 일이 일어났다. 5공 정권이 새정당을 만

들면서 참신한 인물로 그에게 전국구의원을 제안한 것. 많이 갈등했

지만, 여성들의 정치 참여 확대를 부르짖어왔던 터라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그것이 그의 7년간 정치활동의 시작이었다.

국제활동 경험을 살려 처음 외무위원 소속으로 의원활동을 시작했

다. 바로 전 해인 80년 NGO대표로 코펜하겐의 유엔여성대회에 참석

했을 때, 대부분의 나라들이 유엔여성차별철폐협약에 가입한 데 반

해 우리 정부는 가입하지 않고 있었다. 이에 국회의원이 되고 첫번

째로 활동으로 그는 우리 정부가 여성차별철폐협약에 가입하도록 했

다. 그 다음은 여성문제 전담기구 설치였다. 그는 여성개발원법을 제

안했고, 83년 국회를 통과해 그해 여성개발원이 건립되었다. 연구기

관뿐만 아니라 정책을 심의하고 정부에 자문할 수 있는 기구가 필요

하다는 판단에 84년 국무총리 산하 여성정책심의위원회 구성을 추진

했다. 또 88년 12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여성의원들과 함께 여성장관

이 한 명도 임명되지 않았던 것에 대해, 여성관련 업무를 전담할 정

무2장관실 설치, 여성장관을 임명해 줄 것 등을 대통령 당선자에게

요구해 받아들여졌다. 11대 후반부터는 여성문제를 주로 맡았던 보

사위원회로 자리를 옮겼다. 보사부 위원으로 있는 동안 그는 전화교

환원 김영희 씨의 ‘기능직 여성공무원 조기정년 시정’을 요구하는

소송을 도와 성과를 거뒀다.

88년 김정례, 한양순, 김영정 씨 등 당을 초월해 여성 8명이 아세아

재단의 후원을 받아 미국 여성들의 정치활동을 시찰갔다. 그때 미국

여성정치연맹(NWPC)이라는 단체를 알게 됐다.

“미국 여성의원들이 그곳을 통해 훈련받고 정치에 진출하는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도 그런 단체가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90년 부활한 지방자치선거에 큰 기대를 걸었지만, 0.9%밖에 여성들

이 당선되지 못한 걸 보고 그는 참담했다. 이에 91년 정치경험이 있

는 몇몇 여성들과 함께 후배여성들의 정치참여 확대를 위해 ‘한국

여성정치연맹’을 결성했고, 1,2대 김정례 총재에 이어, 3대 총재를

그가 맡고 있다.

“정당을 초월해 활동하는 데는 어려움도 많았어요. 여당에서는 야

당을 지지하는 게 아닌가, 또 야당쪽에서는 여당쪽으로 기울어지는

게 아닌가 그런 오해를 받기도 해요. 우리 정치계는 정당중심으로만

일을 하려는 경향이 있어요. 아직까지 초당적으로 여성정치인들이

힘을 모으기가 힘들다는 걸 일하면서 느꼈죠. 다른 나라에서는 여성

정책을 추진하는 데는 여야가 절대적으로 협력해요. 우리도 이젠 정

당이기주의에서 탈피를 해야 한다고 봐요.”

98년 관련단체인 한국여성유권자연맹, 한국여성정치연구소, 한국여성

정치문화연구소 등 3단체와 공동으로 ‘여성정치네트워크’를 결성

해, 성명서 발표, 훈련·교육과정 등 공동보조를 취할 부분을 함께

협력하고 있다. 현재 ‘여성정치네트워크’는 여성특위 지원을 받아

유권자 교육, 강사진을 위한 교육과 후보교육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젊은이보다 더 젊게 사는 법,

인터넷과 영어

대학 은사들의 영향을 받아 젊은 시절 독신으로 살리라 했던 그는

미국 유학시절 콜럼비아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던 남편을 만났다.

개방적인 집안 분위기에서 자라 여성에 대한 편견도 전혀 없고, 보

통 남자들과 달랐던 남편을 만나 그는 독신주의 노선을 바꾸고, 53

년 귀국해 결혼을 했다. YWCA에서는 2년간 훈련받은 인재가 바로

결혼해 버리는 것에 대해 우려했지만, 그는 결혼 후에도 결코 집에

만 있지 않고 자신의 몫만큼 활동할 것을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켰

다.

아들 5형제 중 막내 며느리로 시집살이를 전혀 모르고 살았고, 오

히려 유학에서 귀국한 지 얼마 안 있어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

에, 친정 어머니를 그가 모셔야 했다고. 장모와 처제 둘까지 처가 식

구를 부양하고, 아들 노릇한다는 것이 지금도 쉽지 않은 일인데, 불

평 한 마디 없이 해준 남편에게 그는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

그는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기계공학을 전공한 첫째 아들(45)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로 있고, 둘째 아들(43)은 구조공학을

전공하고 건설안전기술원의 전문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영문학을

전공한 외동딸은 한국자원봉사능력개발연구회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연세대에서 33년간 교수로 재직하다 지금은 은퇴한 남편과 그는 단

둘이 산다. 아직도 1년이면 한두 차례 국제회의에 나가야 하지만, 젊

었을 때부터 아내의 활동에 대해선 전혀 불만을 갖지 않는 남편이

다. 유학을 오랫동안 하며 자취 경험이 많아 지금도 식사를 스스로

해결할 정도로 가사일에 대해서도 전혀 편견이 없다고.

일흔을 넘긴 나이지만 그는 2-3년전부터 21세기 필수 도구인 컴퓨

터를 배우고 인터넷 활용을 생활화하고 있다.

“처음엔 학원에 다니며 배워볼려고 했는데, 어려워서 잘 못 따라갔

어요. 그러다 집에서 주말마다 아들들에게 배우기 시작했죠. 인터넷

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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