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꿈을 안고 찾아온 한국,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중국에서 꿈을 안고 찾아온 한국,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 왕선아
  • 승인 2013.11.13 09:57
  • 수정 2013-11-20 10: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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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 왕선아씨의 6년간의 한국생활

 

왕선아씨 (중국)
왕선아씨 (중국)
“이제 다시 울지 않겠어, 더는 슬퍼하지 않아. 다시 외로움에 슬픔에 난 다시 흔들리지 않겠어. 힘이 들 때 하늘을 봐 나는 항상 혼자가 아니야. 비가와도 모진 바람 불어도 다시 햇살은 비추니까!.”

이 노래는 한 때 저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되어주던 마음의 상처를 치료해주던 서영은의 ‘혼자가 아닌 나’라는 노래가사 중 일부분입니다. 노래 가사가 마치 저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쓰여진 것 같아서 이 노래를 들으면 지나간 6년의 세월이 눈에 선합니다. 지금 어느 누구보다 행복한 날들을 보내고 있지만 행복을 얻기까지는 참 많은 눈물을 흘려야만 했습니다. 

- 이별과 만남 

2000년 초 중국의 아름다운 바다도시 청도의 한족 여자였던 제가 전생에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국남자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중국에서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던 중 2006년 어느 날 남편의 회사가 갑자기 파산해 한국으로 와야했습니다. 고향을 떠나지 싶지 않았지만, 중국 속담 ‘嫁鸡随鸡,嫁狗随狗(가계수계 가구수구, 여자는 출가 후에 좋든 싫든 일생동안 남편을 따라야한다)’에 따라 어렵게 경영해 온 미용실을 접고 남편을 따라 한국에 왔습니다. 벚꽃이 만개하여 여자마음을 설레게 하는 봄날 한국 땅을 밟게 되었습니다.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만 해도 많이 흥분하고 기대가 되었는데 내리는 순간 온통 못 알아듣는 한국말들과 못 알아보는 한글을 보고 그때서야 두려움이 앞서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시댁식구들은 반가운 얼굴과 따뜻한 마음으로 저의 두려운 마음을 다독여주셨습니다. 그 때의 그 따뜻함은 아직도 저에게는 큰 감동을 안겨줍니다.

-혼자라는 외로움 

제가 상상해왔던 한국생활과 실제 한국생활은 완전히 천지차이였습니다. 남편은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많이 바빴습니다. 지금은 지역마다 다문화가족지원센터나 복지관에 다문화관련 프로그램이 많이 있지만 6~7년 전만 해도 한국에서 ‘다문화’라는 말 자체가 낯설 정도로 도움을 받을 곳이 거의 없었습니다. 갈 곳이 없어서 매일 혼자 집구석에 앉아서 저를 애지중지 키워주신 부모님 얼굴을 떠오르며 고통스러움까지 더해져갔습니다. 그 때마다 고향집에 전화를 하면 울기만 하고 수화기를 놓지 않아, 한 달 전화요금이 80만원이나 나올 정도였습니다. 하루가 일 년 같이 마음으로 울며 힘든 나날을 보냈습니다.



-마음으로 전해지는 감동

한국에서 지내는 첫 설날이었습니다. ‘每逢佳节倍思亲(매봉가절배사친)’ 고향에 계신 가족이 너무 그리웠습니다. 시부모님이 안계시기 때문에 큰 댁에 갔습니다. 커다란 상 위에 가득 찬 음식들 보고 한참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중국은 같은 유교 나라라서 제사도 지냈지만 이렇게 풍성하게 제사지내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없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조상님께 드리는 정성과 한국 특유의 정이 깊게 느껴졌습니다. 밥을 먹을 때, 형님께서 마술이라도 부린 것처럼 중국의 명절음식 물만두를 한 그릇 주방에서 들고 나왔습니다. 너무 놀라고 감격한 나머지 저는 할 말을 잃었고 눈물만 고였습니다. 알고 보니 큰 형님이 저를 생각해서 며칠 전에 남편한테 전화를 걸어 물어본 뒤 물만두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 해 설날은 무척 추운 날씨였지만 제 마음 속은 따뜻한 봄이 온 것만 같았습니다.

-따뜻한 관심이 필요한 마음의 상처

어느 덧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이제 한국말이 조금씩 늘었고 자심감도 생겼습니다. 해보고 싶은 일이 많았지만 직장 구하는 일은 하늘의 별 따기였습니다. 가까스로 집 근처의 한 카메라 공장에 취직했습니다. 의사소통이 잘 안되어 오해가 종종 생기고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불량품이 나올 때 원인을 설명 할 수 없어 너무 답답하고 억울하기도 했습니다. 제품 수량이 부족할 때는 저를 오해하는 것 같은 눈빛을 느끼기도 해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가끔 동료들이 저에게 말할 때 쓴 말이 반말인 줄 모르고 똑같이 다른 동료들한테 사용했다가 예의를 모르는 사람으로 손가락질 받을 때도 있었습니다. 한 번은 제품 운반하다가 잘못하여 허리를 크게 다쳤습니다.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으려고 갔습니다. 엎드려서 침을 맞는 순간 눈물이 비가 오는 듯 줄줄 내렸습니다. 의사선생님은 당황하시며 “많이 아팠구나!”하시며 위로해주셨습니다. 사실은 동료들에게서 받은 마음의 상처가 더 큰 고통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그렇게나 많은 눈물이 흐르지 않았나 싶습니다.

-성장의 시간

 어느 날 시간을 갖고 생각해보니 전 이제 갓 태어난 갓난아이와 같아서 아직 기어 다니지도 못하는데 걸으려고 하면 다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긴 시간을 인내하고 모든 것을 0부터 시작하자는 결심했습니다. 제 인생사전에 성공도 실패도 있을 수 있지만 포기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전철역의 무료신문, 골목의 전단지, tv 등 이 모든 것들이 저에게는 제일 좋은 한국어교재와도 같았습니다. 베개 밑, 화장실, 가방 안에 항상 한국어 책이 있을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이를 악물고 공부한지 6개월 만에 한국어능력시험 4급에 당당하게 합격했습니다.

한층 더 발전하기 위해서 ‘대교 차이홍 중국어’의 학습지 지도교사로 지원했습니다. 엄격한 교사훈련을 마치고 전문적인 중국어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아이들을 잘 가르치는 것뿐만 아니라 회원관리도 잘 해야 했습니다. 힘겨워 하던 저를 지지해 주신 교육국장님께서 저에게 cd를 한 장을 건네 주셨습니다. 국장님께서는 “한 때 나한테 힘이 되는 노래야. 왕리리씨한테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그 노래가 서영은의 노래 ‘혼자가 아닌 나’였습니다. 그 후로는 매일매일 이 노래를 들으면서 자신감을 회복하고 힘든 위기의 순간을 극복했습니다. 그렇게 빠른 시간 안에 회원이 40명이나 늘어 한동안 교육국에서 능력 있는 교사 1호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복지관에서 이주여성들 위한 일자리창출지원사업으로 직원을 채용한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무려 30명이 넘는 지원자 중에 2명만 채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치열한 경쟁 끝에 저는 최종 합격하여 취업에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이 기회는 저한테 우연히 온 것 아니었던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알았기 때문에 더욱 노력해야겠다고 굳게 다짐했습니다. 이주여성들을 위해 일을 하면서 이주여성의 삶에 있어 불공평한 대우와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안타까운 사건을 종종 보게 되었습니다. 더 전문적인 지식을 배워서 그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가정폭력상담원’ 자격증을 취득했습니다. 그 이후에도는 중국어강사 자격증으로 복지관에서 중국어 프로그램을 맡게 되어 지금까지도 중국어강사로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일하는 동안에도 한국어 공부를 소홀하지 않은 결과로 다시 한국어능력시험에 도전하여 ‘고급’에 합격했습니다. 그리고 다문화이해교육 강사로서도 다문화이해교육강사 경진대회에서도 두 차례 수상하게 되었고 운전면허증도 취득하며 조금씩 발전하다보니 예전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저 자신 스스로에게 많은 격려와 칭찬을 해주고 싶습니다.

- 가슴에 묻은 슬픔 

 잇달아 오는 경사에 마냥 좋기만 했던 날들이 이어지는 끝에 슬픔의 순간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잉꼬부부라고 불릴 만큼 부부애가 남달랐지만 둘째아이를 소식이 없어 아이소식이 있기를 원하며 항상 고민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12년 만에 둘째를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임신소식을 듣는 순간 남편 눈이 촉촉해질 만큼 너무 좋아했습니다. 저는 그야말로 왕비 못지않게 밥이 오면 입을 벌리고, 옷이 입혀주면 손을 내미는 대우를 받았고  집안일들도 남편이 거뒀습니다. 하지만 행복한 시간은 늘 짧은 것 같습니다. 두 달 무렵이 되었을 때 갑자기 유산하게 되었습니다. 하늘이 무너진 것 같았고 몸도 마음도 너무 아팠습니다. 남편 어깨가 들썩들썩 하는 뒷모습을 보며 더 속상했고,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습니다. 며칠 동안 너무 우울해서 죽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이때 동료들이 소식을 듣고 문자가 한 통 한 통 조용히 날아왔습니다. 문자 속에 담겨있는 따뜻한 말들은 저한테 더없이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복지관 선생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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