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롤모델이었다”

한글은 국보 70호이자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문화유산이다.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글자라고 자랑하면서 왜 일상에선 쉬운 한글을 놔두고 한자 일색인가’라는 의문을 갖던 19살 소년이 있었다. 이대로 우리말살리기겨레모임 대표다. 그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46년간 우리말 살리기 외길 인생을 걸어왔다. 그런 그이기에 한글날이 23년 만에 공휴일로 재지정된 감회가 누구보다도 남다르다. 서울 종로 YMCA에서 이대로 대표를 만났다.

“젊은이, 인생을 걸어도 좋소”

이대로 대표의 인생을 바꾼 건 주소도 없이 보낸 편지에 즉시 답해 온 5장짜리 편지 한 통이었다. 그는 이 편지를 받고 소름이 끼쳤다고 했다.

“신문을 거꾸로 본다는 얘기가 농담이 아니던 때였어요. 60년대만 해도 농촌마을에 열이면 둘밖에 글을 읽을 줄 몰랐으니까. 그런데 학교에선 ‘가지치기’를 ‘적화’라는 낯선 한자말로 가르치고, 신문은 조사만 빼고는 모조리 한자고, 도서관에서 보고 싶은 책을 읽을라치면 쓸만한 건 온통 한문책만 있었죠.” 광복을 했는데도 일제 때처럼 한문을 쓰자고 주장하는 지식인들을 보니 세상이 거꾸로 가는 것 같았다. 한양대 김윤경 교수가 쓴 ‘한글이 살아야 겨레가 산다’는 신문 칼럼을 보고 울분에 차 당장 편지를 써내려갔다. ‘이 글은 말로만 그치고 현실에선 거짓이 아니냐. 정부도 반대로 가고 있다. 나는 현실이 잘못된 것 같은데 내가 한글운동에 몸 바칠 만큼 한글이 가치 있는 게 맞느냐’란 요지의 글이었다. 그 즉시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소리글자”라며 “나는 늙어 세상을 떠날 때가 가까웠다. 한글을 사랑하는 젊은이를 만나 반갑다. 꿈을 포기하지 말고 대학에 가라”는 답장이 왔다.

이 편지를 받고 졸업만 하면 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짓겠다던 6남매의 맏이는 우리말 살리기의 꿈을 안고 서울로 떠났다. 그 결의는 그의 이름에도 잘 드러나 있다. 본명은 이택호, 이대로는 대학에 가서 그가 직접 지은 한글 이름이다. 또 뿌리 정신을 잊지 않기 위해 단군, 세종대왕, 주시경 선생의 사진을 지금도 항상 지니고 다닌다.

세종대왕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롤 모델

동국대에 들어간 이 대표는 서울대·연세대·고려대와 연합해 전국국어운동대학생회를 만들었다. 민간인이 만든 최초의 한글운동학생회다. 여기서 1948년 만들어진 ‘한글전용법’을 지키자는 운동을 펴나갔다.

이 얘기가 청와대에 들어가자 박정희 전 대통령은 문화특별자문을 불렀다. 당시 대통령 문화특별보좌관은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을 했던 이은상 시인. 광복 뒤 두 번째로 만들어진 호남신문을 한글 전용으로 창간할 만큼 한글에 대한 의식이 투철한 분이었다. 그는 대통령에게 “한글 전용을 실천하면 세종대왕 다음으로 한국인이 존경하는 위인이 될 거다”라고 답했다. 세종대왕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롤 모델로 삼는 분이기도 했다. 세종대왕 덕분인지 대학 시절 우리말지킴이 운동의 시작은 순항이었다. 이듬해인 1968년 박 전 대통령은 한글전용 촉진정책을 발표했다.

쉬는 날이 아니라 기리고 기뻐하는 문화경축일

1990년 한글날 공휴일이 폐지됐다. 전경련, 경총련, 조선일보를 중심으로 하루 더 쉬면 경제 생산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한글날이 사라지게 됐다. 한글운동 진영은 전교조, 참여연대, YMCA, 민주노총 등 시민단체들과 힘을 모아 각고의 노력 끝에 2005년 한글날을 국경일로 위상을 높이고, 2012년 공휴일 재지정에 성공한다.

“한글날은 그냥 노는 공휴일이 아니라 국가와 국민의 힘을 키우는 날이에요. 각 나라를 보면 그 나라의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축제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스스로를 낮추는 습관이 있는데 한글날을 문화경축일로 만들어서 즐기고 자긍심도 고취시키면 하루 더 일하는 것 이상의 가치와 의미가 있다는 걸 생각 못하는 게 안타까웠어요.”

우리나라의 국경일은 삼일절, 광복절, 제헌절, 그리고 한글날이다. 그런데 삼일절은 독립운동을 했어야 했던 슬픈 날이고, 광복은 우리 힘으로만 이룬 게 아니다. 법을 세운 제헌절은 지금도 여전히 학계에선 3월설·7월설로 갑론을박 하고 있다. 그러니 유일하게 순수히 기뻐할 수 있는 날은 한글날뿐인 셈이다.

“나는 각자다?” 우리가 아껴야 세계에 통한다

2000년 한글날 국경일 제정을 위해 국회 공청회를 할 때의 일이다. 이대로 대표가 “나는 각자다” 하고 말하며 모인 사람들에게 알아듣겠냐고 물었다. 국·한문 혼용을 주장하던 이들은 물론이고 거기에 모인 모두는 어리둥절해했다. “깨달은 사람(覺者)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쉬운 한글을 두고 한문을 쓸 필요가 뭐가 있소?”

이대로 대표는 한글이 세계에서 인정받으려면 우리가 스스로 한글을 아끼고 잘 쓰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말한다. 한글은 전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글자로 알려져 있지만 정작 한국에선 여전히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일제 잔재에 뿌리를 두고 1960년대부터 줄기차게 이어져온 한문 혼용 주장은 독재 시기를 거쳐 민주정권이 들어선 후에도 사라지지 않았고, 김대중 정부 때는 세계화 바람을 타고 영어 공용화 움직임이 일어나며 외국어까지 한글 위협에 합세했다.

“한글이 가야 할 길에는 크게 3단계가 있다고 봅니다. 1단계는 ‘적기’입니다. 한글을 쓰는 단계로 어느 정도 이뤄졌다고 봐요. 2단계는 ‘다듬기’예요. 좋은 한글을 쓰는 단계로, 과학용어. 의학용어, 외래어를 한글로 순화하는 것도 여기에 속합니다. 마지막 3단계는 ‘잘 써먹기’입니다. 한글을 이롭게 이용하는 단계죠.” 이대로 대표의 한글을 향한 발걸음은 지금도 거침없는 진행형이다. 한글에 대한 사료를 모아 보여줄 수 있는 한글역사문화관(한글박물관) 건립, 광화문과 경복궁 일대를 한글관광문화관광지로 만드는 한글마루지 사업, 세종대왕 생가터 복원사업 등을 추진하며 한글을 문화자산으로 만드는 일에 힘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