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도시의 농부가 되다

흙을 만지면 기분이 좋아진다. 손끝을 자극하면 행복 호르몬이라 불리는 ‘세로토닌(serotonin)’이 분비된다. 무엇보다 흙이 품고 있는 생명의 기운이 전해진다. 최근 미국에서 재배·판매·소비가 금지된 유전자조작(GM) 밀이 발견돼 수입 밀을 비롯한 유전자변형 작물의 안전성에 대한 논란이 다시금 들끓고 있다.

‘도시농업’이 유행하면서 ‘식물공장’이라는 형태의 시스템도 등장해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제품을 생산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환경제어, 인공조명 등의 기술을 이용해 기후와 지역에 관계없이 공장에서 연중 농산물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식량안보, 식량위기 등의 단어가 주는 불안감이 어마어마해 과학과 기술의 힘을 그냥 믿어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안전하고 바른 먹거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흙이 건네는 기운을 퍼뜨리는 사람들이 도심에 늘고 있다는 소식은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자투리 공간에서, 혹은 주말농장에서, 옥상에서, 상자로, 자루로, 다양한 형태로 도시에서 텃밭을 가꾸는 일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참으로 기쁘고 기분 좋은 유행이다. 도시에서 텃밭을 일구는 일은 단순히 내가 먹을 채소를 직접 기르는 것을 넘어 순환과 공생의 가치를 지향하는 행위다. 삭막하고 바쁜 도시에서 텃밭이라는 공간은 농사를 매개로 타인과 또 자연과 함께 살 수 있는 사회를 위한 변화의 씨앗이 된다.

서울 문래동 철공소 옥상에 만들어진 ‘문래도시텃밭’은 철공단지, 예술촌, 아파트 주민들의 소통 공간이다. 이웃을 알아가고 음식을 나누며 도시의 정을 차곡차곡 쌓은 사람들에게 텃밭은 지역의 일을 의논하고 결정하는 정치의 광장이 되기도 한다.

텃밭은 도시 속, 정이 그리운 ‘나 홀로족’을 불러 모으기도 한다. 합정동 주거지역의 복합문화공간 옥상에 자리 잡은 텃밭 ‘대륙’에서는 도시에 혼자 사는 사람들이 모여 건강한 먹거리를 챙기고 수확의 기쁨을 나누며, 정서적 유대감을 만들어가고 있다. 소비문화가 넘쳐나는 홍대에서 도시농부를 자처하는 청년들도 있다. 빌딩 숲 한가운데 위치한 텃밭 ‘다리’의 도시농부들은 자급적 삶의 기술로 농사를 배우며, 도시의 소비자와 농부가 가까워지는 로컬푸드(Local Food) 운동도 함께 하고 있다. 시골 패션의 상징인 땡땡이·꽃무늬 고무줄 바지를 입고 도시를 활보하며 호미질을 하는 이들에게 도시농사는 하나의 놀이이자 새로운 문화다.

도시농부와 소비자를 연결하는 시장도 생겨났다. 매달 서울 곳곳에서 열리는 ‘마르쉐@’는 기르고 먹고 나누기를 좋아하는 농부, 요리사, 수공예 작가가 함께 만드는 장터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얼굴을 마주하고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만들어가는 도시형 음식 장터인 셈이다.

도시농업은 농촌과 도시, 생산과 소비의 분절된 현대문명을 넘어 도시에서 실천 가능한 대안이다. 빠르고 바쁜 도시의 일상에서 농사는 느림의 가치를 되새기고, 경쟁 대신 자연스러움이라는 기준을 몸에 배게 한다. 아이들은 학교 텃밭에서 뛰놀며 생태 감수성을 키우고, 청년들은 공동체 텃밭에서 자급적 삶의 양식을 익힌다. 아파트 공터의 텃밭은 노년기에 발견한 새로운 취미생활이 되기도 하고, 병원의 텃밭에서 작물을 가꾸며 환우들은 스스로를 치유하기도 한다. 빗물을 모으고, 음식물쓰레기 퇴비를 만들면서 자연스레 에너지 위기에 관심을 갖는다. 직접 키운 토종 오이 맛을 보면서 토종 종자 지키기 운동에도 슬며시 눈길이 간다.

흙을 만지고 작물을 키우는 일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사회가 효율을 중시할 때 형성되는 수직적 관계의 빈틈은, 도시농업을 통해 텃밭을 넘나들며 형성되는 수평적 관계로 메울 수 있다.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나누면서, 일상을 돌보고, 지구를 돌보는 일이 도시농사를 통해 가능해진다.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자연을 느끼다 보면 자연을 위한 실천은 더 이상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살고 싶고 살 수 있는 도시를 만드는 일은 지금 우리의 손에 달려 있다. 흙을 만지는 일은 위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