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적 남성은 ‘딸 바보’, 모성애에 도전하지만…
‘7번방의 선물’ ‘아빠 어디 가’ ‘내 딸 서영이’ 등 부성애로 대박 행진
요즘 대중문화에서 ‘아빠’를 빼면 얘기가 안 된다. 혹자는 이를 두고 ‘파파 르네상스’라 하고, 혹자는 여성과 남성의 젠더(gender) 역할이 바뀌고 있다고까지 해석한다. 과연 그럴까.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부성애 코드의 대표 주자는 이제 1000만 관객을 넘어 한국영화로는 처음으로 박스오피스 3위의 자리를 꿰찬 영화 ‘7번방의 선물’,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기록(닐슨코리아 17일 전국 시청률 집계 결과 15.1%) 중인 MBC TV 예능 프로그램 ‘일밤-아빠! 어디가?’, 그리고 얼마 전 5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종영한 KBS 2TV ‘내 딸 서영이’다. 각각 다른 장르에, 다른 스토리 라인이지만 가장 강력하게 부각된 코드는 부성애다.
그런데 이들 대박 콘텐츠만 그런 게 아니다. 공식적으론 미혼임에도 불구하고 악랄한 옛 연인과 생모의 온갖 방해 공작에 맞서 입양한 딸과 아이들을 지키고 헌신적으로 키워내는 아빠들(MBC 아침드라마 ‘사랑했나봐’․ KBS 일일드라마 ‘힘내요, 미스터 김!’), 상처 후 딸만 바라보며 아내의 빈자리를 대신하는 아버지(MBC 주말드라마 ‘백년의 유산’), 아버지와의 추억을 얘기하다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속 깊었던 아버지의 정을 새삼 깨닫고 목이 메는 남자들(SBS 예능 프로 ‘땡큐’) 등 TV를 켜는 순간 아침부터 밤까지, 평일부터 주말까지 다양한 모습의 착한 아빠들을 마주치게 된다. 1990년대 후반 IMF 외환위기의 파고를 타고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한 장편소설 ‘아버지’(김정현)나 ‘가시고기’(조창인) 이후 또다시 찾아온 아버지 신드롬이라 할 만하다. 당시의 아버지 신드롬이 평생직장을 빼앗긴 초라한 아버지의 자화상으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면, 현재의 아버지 신드롬은 사회 변화와 트렌드에 맞춰 좀 더 친근하고 부드러워졌다. 대중 용어로 정착한 ‘딸 바보’가 이를 시사한다.
연성화된 아버지 ‘딸 바보’의 붐 배경엔 여성의 활발한 사회진출과 약진, 장기적인 경기침체가 있다. 그러나 이들 요인을 압도하는 것은 갈수록 어려워지는 현실에서 이제 마지막 기댈 곳은 ‘가족’밖에 없다는 절박한 가족주의다. 남성들 스스로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최근 한 종편 채널의 시사 프로에 나온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각박한 경쟁 사회 속에서 스펙도 따지지 않고 무조건 나를 사랑하고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가족이고, 그 대표자로 ‘딸 바보’ 아빠가 등장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여기에 맹위를 떨치던 엄마 신드롬이 아버지 신드롬으로 대체되고 있는 주요 이유는 대중문화의 소비성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동안 엄마 코드는 충분히 나왔으니 이제는 아버지 코드로 가는 것이 더 참신하다는 것. 그는 “대중문화 속에서 엄마들의 모습이 극악한 잔소리꾼에 날로 표독스러워지고 있기에 상대적으로 아버지의 모습은 좀 더 인자하고 이해심이 있는 모습으로 표출되고 있다”고 덧붙인다. 말하자면 가족 내 성 역할의 변화가 아니라 이미 있던 기존 역할에서 엄마와 아빠의 모습만 표피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수연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선임 연구위원은 “(아버지가 통념적인 엄마 역할까지 적극적으로 대신하기에) 가정 내 젠더 역할에서 경계가 모호해진 감이 있다”고 인정한다. 그는 “현재 부각되고 있는 헌신적인 부성애는 그리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다만 좀 더 섬세해진 감이 있다”고 말한다.
한편에선 여성운동의 확산과 페미니즘의 대중화, 경제 위기 이후 급변한 사회 분위기에서 딸 바보 붐의 맥을 짚는다. 이의수 남성사회문화연구소장은 채널A에 출연, “가족들은 그동안 아버지의 부재에 목마름을 느껴왔다. 이에 더해 아버지 스스로 예전처럼 가부장적으로 군림해서는 (가족 사이에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설명한다.
임정희 문화연대 대표는 상당히 부정적 입장이다. 헌신적인 아버지 뒤에 역시 헌신적인 엄마가 있기에 사회적 위기 속에도 가정이 유지돼 왔는데 대중문화는 끊임없이 “어깨가 축 늘어진” 아버지의 희생만 부각시켜 착시현상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더 위험한 것은 딸 바보 코드가 현실 속 한부모가정, 다문화가정, 1인가구 등 다양해지고 있는 가족에 대한 이해를 넓히기보다는 ‘정상 가족’ 통념을 강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실패한 아버지와 딸의 갈등관계를 통해 나름 새로운 시도를 한 드라마 ‘내 딸 서영이’의 예를 들어 드라마 속 아버지가 목공소를 하는 이웃 여성과 대화하며 이해와 위로를 받지만 결국 이 여성이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면 영원히 주변인으로 머물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적한다. 언뜻 보면 개과천선한 아버지들 때문에 가족 문화가 진일보한 인상을 풍기지만 한 꺼풀 벗겨보면 가족의 보수성이 두드러지는 현상도 일어날 수 있다는 의견이다.
아버지의 새로운 정체성과 역할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 없다면 딸 바보 신드롬은 21세기 가족에 대한 이해의 틀과 폭을 넓히기보다 가족 중심의 개인주의를 효과적으로 강화시키는 위험에 빠질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