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은 윤주의 친구인 동지, 청명, 신정, 상강이 거실에서 영화를 보면서 훌쩍거리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윤주의 이모이자 트랜스젠더인 말복이 수선화를 들고 부엌에서 나오며 네 명의 여자들에게 잔소리를 해댄다. 그 과정에서 각자의 상처들이 드러난다. 윤주의 제삿날이라는 것도 밝혀진다. 윤주의 죽음과 둘러싼 각자의 기억들은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작품은 잠수정으로 남한에 침투했다가 자살한 북한 공작요원 9명의 이야기인 연극 ‘고래’를 선보여 호평을 받았던 이해성이 각본을 쓰고 연출한 신작이다. ‘고래’ 당시에는 모든 인물을 남성으로 설정해 사회적 이슈를 던지고, 선 굵은 연기와 거친 대사를 선보였다. 그러나 ‘사라지다’는 성 전환한 말복을 포함해 모든 등장인물이 여자다. 동창생들의 수다로 가볍게 시작되며, 섬세한 심리묘사가 돋보인다.
연출가 이해성씨는 “우리는 경계가 없는 상태를 인식하는 데 서툴다. 성 전환, 불구, 동성애, 영혼, 정신병, 이혼, 해체, 전위 같은 단어들에 본능적으로 놀라고 두려워한다. 그 거부의 순간, 경계는 한계가 된다. 사실은 이 모든 것들의 경계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연극이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실제 중년의 나이에 대학로를 꿋꿋이 지키고 있는 중견 여배우들이 대거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35년 연기 인생 최초로 트랜스젠더에 도전하는 파격 변신을 훌륭히 소화한 박용수씨를 필두로, 이름만으로도 관객들에게 신뢰를 주는 탄탄한 연기력의 강애심, 김동완, 황세원, 박윤정, 우수정, 김원정, 황은후가 그들이다.
연극 ‘사라지다’는 서울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에서 오는 20일까지 공연된다. 문의 02-758-2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