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경꾼으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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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허은숙 화백
아침 아홉 시에서 열 시 사이, Y는 모지항에 도착했다. 그는 성옥이가 그랬던 것처럼 지하철 역사에서 사방을 돌아보았다. 산등성을 넘은 아침 해는 청아했고 출근과 등교를 마친 거리는 한산했다. 역사 귀퉁이에 놓인 인력거 옆에는 검은색 사무라이 옷을 입은 청년 인력거꾼 둘이 웃으며 이야기 하고 있었다. 소박한 차림의 어른들이 드문드문 역사를 가로질러 안으로 들어가거나 출구를 나와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꽃이 진 뒤에도 한 개의 계절을 건너뛴 벚꽃 가로수 사이의 길은 넓지 않고 단아하고 화려하지 않은 건물의 인상은 겸손하기까지 했다.

Y의 시선이 가깝게 스친 풍경은 이랬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현재의 풍경에 머물지 않고 자꾸만 보이지 않는 시간 속, 지금은 없는 사람들의 생활이나 삶을 좇고 있었다. 성옥의 고모가 돈을 벌었다는 온천 거리는 저긴가? 생각하며 역사의 오른편으로 깊고 넓게 시선을 던지고 그곳을 걸어 다녔다. 관광객이 즐겁게 돈을 쓰도록 배려한 음식점과 기념품과 잡화를 파는 상점 건물은 딱히 이악스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딘가에서 잔인과 오만과 탐욕과 차별의 증거를 찾고 싶어 하는 자신을 느끼곤 스스로 의아해했다.

이윽고 그는 바다로 걸어 나갔다. 바다에 가면 누군가를 만날 것 같은 착각이 바람결처럼 스치기도 했다. 무언가 과거로 가까워진다는 느낌이 들면 둥실둥실 몸이 떠오를 것 같고 그런 느낌은 아릿한 슬픔을 자아내게 했다.  

바다로 난 길을 걸으며 그는 1945년 늦은 여름을 생각했다. 짧았던 여름의 꼬리가 다 빠지고 아침저녁이 선선한 추석도 지나고 한기가 끼칠 무렵, 이미 뱃삯을 술값으로 탕진한 조선 청년의 마음을 생각해 보았다. Y가 생각하려 하지 않아도 자꾸만 떠올랐다. 배가 폭발할 지경에 이르도록 조국으로 떠나던 식민지 조선의 남자들. 일본 땅에 침을 뱉던 동족에 휩쓸리지 못한 성옥의 할아버지를 생각했다. 그 할아버지의 아들은 함경도의 바닷가에서 동쪽만 바라보았다고 했다. 그 남자의 딸은 아버지의 자유주의를 고발하고 싶어 성장기가 온통 분노와 불안으로 뭉개지고 구겨졌다고 했다. 그 딸이 아버지와 화해하기 위해 왔던 곳, Y는 그들 가족의 역사를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는 흔적을 느끼려고 했다. 그는 바닷가에 이르러서 건너편의 곡선을 이룬 시모노세키의 해안을 바라보며 문득 생각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흔적이라고. 

Y는 바닷가에 놓인 나무 의자에 앉았다. 드문드문 놓인 의자는 아직 모두 비어 있었다. 운동복 차림의 중년 부부가 함께 달리기를 하며 지나갔다.

시간이 바람처럼 흘렀다. 그는 마치 시간 밖으로 나간 사람처럼 하염없이 앉아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머릿속에는 성옥으로 가득 찼다. 아버지를 이해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던 성옥의 목소리와 표정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는 가 본 적이 없는 함경도의 바닷가를 상상했다. 그곳에 자전거를 타고 가서 먼 바다만 바라보았다던 성옥이의 아버지를 생각했다. 건너온 바다를 살아서는 건너지 못한다는 운명을 그저 술로 잊고 지낸 남자. 그 아버지의 딸이 와서 울고 갔다는 바다에서 그는 그들의 가족사를 느끼며 명치가 뻐근했다.

그는 휴대폰을 꺼냈다. 그러나 한 손에 들고 다시 바다를 향해 먼눈을 떴다. 성옥은 수업을 듣는 중일 거라 생각했다. 졸업반이 되어갈수록 불안하다고, 대학만 나오면 한국 사람처럼 씩씩하게 살 것 같았는데 그렇지 않다고 불안을 감추지 못한 적이 있었다. 술기운으로 고백할 때 이런 말도 했었다.

가장 견딜 수 없는 건 자신이 왜 이런 운명으로 살아야 하는지, 화가 나요.

성옥의 말소리와 표정이 생생했다.

성옥아. 내가 어디 있는지 알아?

그는 정작 전화기가 들린 손은 의자 위에 얹은 채 생각했다.

난 내가 어떻게 너를 만났는지, 왜 여기까지 왔는지 그게 궁금하단다.

그는 다시 생각했다. 궁금하단다, 뒤에 성옥이처럼 화가 난다고 덧붙이고 싶어지자, 그는 타인처럼 씩 웃었다.

엊그제 갑자기 일본 출장이 결정되고 나서 Y는 성옥에게 문자를 보냈다. 야, 나 일본 간다. 내용은 간단하고 충분했다. 그러나 성옥의 답장은 그렇지 않았다.

어디로 가나요? 혹시 규슈라면 모지항에 가보세요. 거기 가면 우리 아버지 만날지 몰라요. 성옥이가 잘 산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고 오세요. 아버지의 혼이 모지항에서 떠나지 못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번거롭지 않도록 하세요. 일정에 쫓기지 마시고요.

안 됐다. 난 교토야. 거기서 세미나가 있어. 팀장이 가야 하는데 부친상을 당해서 내가 대타로 간다.

교토에서 동경이 가까운가요? 동경에 가면 우리 엄마 고향에 가봐 주세요. 요코하마 언덕이거든요. 아직 가난한 조선족 집들이 남아 있어요.

아마 시간이 없을 거야.

잘 다녀오세요.

그는 문자 상자를 불러내서 주고받은 문자를 읽었다. 서너 번이나 되풀이해 읽었다. 특히 ‘어디로 가나요?’에서 ‘일정에 쫓기지 마시고요’까지를 읽고 나선 한동안 시선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날같이 지금도 똑 같았다. 그는 길게 숨을 몰아서 내쉬고 휴대폰의 전원을 조용히 껐다.

한일 차세대 건축가 포럼은 하루 일정이었다. ‘현대 건축과 동양사상’이 주제인 포럼에 발제를 하게 된 Y의 문건은 ‘한국 전통 건축의 사상’이었다. 이미 팀장이 써서 보내놓고 책자까지 만들어진 것을 그는 발표만 했다. 하지만 발제문은 회사의 건축 설계에 대한 기본 이념이기도 했다. 한국의 건축은 자연 속에 건축이 있다는 생각으로 자연에 더 접근해 왔다는 점을 여러 사례를 들어 설명했다. 한국 건축은 우선 자연과 소통하므로 안과 밖의 소통이 이루어지고 내부 공간끼리도 소통한다. 그러나 서양 건축은 자연을 적대시해서 자연으로부터 인간의 공간을 분리하고 분리는 경계를 만든다. 거기에 내부 공간은 개인의 보호를 강조함으로써 분리되고 경계 지어진다. 자연과 사람, 사람과 사람의 소통을 건축양식의 기본 정신으로 삼는 한국 전통 건축에서 현대건축이 해답을 얻어야 할 것이란 내용으로 그는 발제했다.

세미나가 끝난 뒤에 그는 혹시 일본에도 탈북자가 있느냐고 일본인 교수에게 물었다. 교수가 머리를 갸웃하더니 스미모토를 데려오라고 곁에 있던 조교에게 말했다. 곧 ‘진행’이라는 표를 목에 건 학생이 다가왔다. 교토대학 건축과에서 파괴공학을 전공한다는 학생의 아버지는 조선인이었다. Y가 정색하고 물었다.

“여기도 탈북자가 있습니까?”

순간 스미모토의 표정이 굳어지는 걸 느꼈다. 그건 Y의 생각일지 몰랐다.

“네. 아버지의 사촌 되시는 분이 함흥에서  왔습니다.”

학생이 영어로 말했다. 그리고 그런 분야에 대해 알고 싶다면 ‘재일 조선인 북송’ 문제 전공자를 불러주겠다고 말했다. 만찬을 할 때 Y는 전공자라는 젊은 교수와 마주 앉았다. 그는 북송의 여러 가지 문제를 이야기 했다. Y가 이미 책에서 읽은 내용들과 비슷한 것들이었다. 그는 이야기를 대충 흘려들으며 시모노세키, 모지항 따위를 생각했다.   

“여기서 시모노세키 갈 수 있습니까?”

그가 문득 돌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자신이 그곳까지 가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심야 버스로도 갈 수 있다고 말한 건 이쪽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스미모토였다. 그는 그곳에 가는 여러 가지 방법 중에서 스미모토가 알려준 심야 버스를 선택했다. 앞자리의 교수는 시모노세키와 모지항 사이의 해협이 아름답다는 것, 시모노세키는 부산 등지에서 출발하는 여객선이 있어서 한 시간 반 만에도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등의 이야기를 술기운에 실어 말했다. 시모노세키와 모지항을 연결하는 다리는 야간에 특히 아름다운데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전력이 모자라 초라하게 됐다고, 교수는 무슨 이유인지 코웃음 같은 것을 비치며 말했다. 그도 이유 없이 작은 소리로 웃고 그들과 힘차게 헤어졌다. 특히 스미모토에겐 서울에 오게 되면 연락하라고 말하고 자신이 건넨 명함을 다시 확인했다. 자신이 건축을 하게 된 건 어릴 때 도쿄의 메이지 신궁 근처에서 본 빌딩의 아름다움에 취해서였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를 배웅하던 스미모토가 말했다. 자신은 일본 사람이며 한국 사람이고 한국 사람이며 일본 사람이다. 국적 문제를 생각하면 혼란스러워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아서 관심도 없다. 언젠가 평양과 서울이 그리워질지는 모르겠다. 스미모토는 야릇한 비웃음을 지으며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순간 Y는 성옥이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할아버지는 남쪽 사람이다, 아버지는 일본 사람이다, 나는 북한 사람이다…. 

Y는 다시 휴대폰을 꺼냈다. 성옥아. 모지항에 있다, 이런 문자를 보내고 싶었다. 그런데 그는 문자 창에 떠오른 문장부터 읽어야 했다.

모국어의 빈곤을 느낍니다. 표현할 수 없어서… 수경.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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