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보 전문가에게 연설문 의뢰·컨설팅
초등 1학년 학생이 자기소개 특강 듣기도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남지훈군은 입학하자마자 지역 문화센터에 등록해 ‘자기소개 특강’을 들었다. 회장 선거에 나가려면 미리부터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게 어머니 서유라(35·서울 신도림동)씨의 생각이다. 자기소개 특강 강사는 문화센터 내에 회장 선거를 치를 초등 2학년 이상 학생들을 대상으로 ‘회장 선거 특강’도 개설 중이다. 이 특강은 모집하자마자 정원 30명이 곧바로 마감됐다. 해당 강좌는 단기 특강으로 비용은 한 시간에 5000원이다.
회장 선거 시즌에 맞춰 학원가에선 회당 수업료가 8만~10만원 하는 ‘회장 선거 대비반’이 개설돼 운영됐다. 연설원고 작성은 10만원가량 비용을 별도로 받고 대행해 준다. 선거 유세 시 바람직한 자세와 화술 지도는 물론 요즘 회장 선거의 필수 요소가 ‘좌중을 사로잡는 한방’인 추세여서 재미 요소를 담은 원고를 작성해 연습시킨다. 학원가의 전교 회장 연설문 원고료는 20만~30만원 정도다.
김이연(42·경기 남양주시)씨는 지난해 아들이 초등학교 전교 회장에 출마하자 지인을 통해 홍보 전문가에게 연설 원고를 부탁하고 회장에 당선된 뒤 사례했다. 김씨는 “회장 경력이 상급 학교로 진학할 때 중요한 토대가 될 것이라는 판단이 들어 아마추어인 부모가 나서기보다 전문가의 도움을 선택했다”며 “특별히 정해진 금액을 몰라 최선의 사례를 했다”고 말했다.
회장 선거에 부모가 비용을 들여가며 적극 나서는 세태는 회장 경력이 국제중학교 입학이나 특목고, 자율고 등 고교 진학 시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인식과 대학 입시에서 수시전형 비율이 높아지면서 리더십이 중요한 평가 항목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학생 스스로 구성원의 마음을 얻어 리더가 되려고 노력하기보다 입시라는 목적 때문에 남의 힘을 빌려 일회적인 ‘보여주기’에 치중해 교육의 본질이 훼손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고2인 정지윤(서울 신림동)양의 말. “중학교 때 회장이 되고 싶어 선거 전까지 한 달 동안 친구들에게 저 자신을 알리고 마음을 얻기 위해 꼼꼼히 계획을 세워 노력했어요. 매일 칠판을 닦는 등 성실하게 학급을 위해 봉사하는 모습을 보여줬어요. 게임을 좋아하는 남학생들을 위해 취미가 없었지만 게임에도 관심을 갖고 대화에 응했고요. 특별한 유세를 한 친구들이 많이 있었지만 친구들이 학급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약속한 저를 회장으로 뽑아줬어요.”
정양은 회장이 된 뒤 약속을 지키고자 반 친구들 전원에게 매일 과제와 전달 사항을 문자 메시지로 알려주고 소외되는 친구가 없도록 생일인 친구 이름을 칠판에 게시하고 자그마한 선물을 준비해 함께 축하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고 했다. 늘 여분의 준비물을 챙기고 학급 청소 같은 궂은일부터 각종 행사 기획과 진행까지 몸을 아끼지 않았다고 말했다. 시험 기간에도 회장 책무를 우선으로 했다. 정양은 “회장 일을 제대로 하려면 정말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한 번도 거르지 않고 회장을 했다는 대학 1학년 윤정(서울 목동)씨도 인상적인 유세로 회장에 선출됐으나 리더십이나 봉사하려는 마음이 없는 친구들이 더러 있었다며 아쉬워했다. 윤씨는 “특히 고등학교에선 많은 학생들이 단지 경력만을 얻기 위해 회장이 된 후 공부하느라 책임을 등한시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선생님들도 입시가 우선시되다 보니 이를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였다”고 전했다.
윤씨는 회장 경력이 반드시 입시에 반영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화려한 회장 경력을 가지고 있지만 재수 끝에 정시로 대학에 입학했다. 입시 전문가나 학원 교사로부터 학급 회장 경력이 수시전형에서 전혀 내세울 만하지 않다는 조언을 들었다. 고2 때 학생회장 출마를 놓고 교사에게 조언을 구했으나 “전교 회장을 맡으면 경력에 직접적인 도움은 못 되고 공부 시간만 빼앗긴다”며 학업에 전념하라는 조언을 듣고 출마를 포기했다. 윤씨는 “회장 경력이 실제로 수시전형에서 도움이 되려면 차별화되고 두드러진 활동을 펼치며 면접 등을 통해 이를 드러내 보일 수 있을 정도가 돼야 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올해 서울 목동의 한 여고 학급 회장 선거에선 7명의 후보가 지원을 했다. 후보들은 “발 벗고 뛰겠다”며 신발을 벗어 들고, 인기 드라마를 패러디해 “여러분의 액과 살을 받아내겠다”고 외치는가 하면, 갑자기 책상을 ‘탕!’ 쳐서 인상을 남기고 심지어 “가식 없는 회장이 되겠다”며 가슴에서 뽕을 꺼내는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학급 나인정(고2)양은 “재미있었지만 재미만 있다면 ‘허경영’”이라며 “회장은 그동안 자질과 태도에서 신뢰감을 보여준 친구가 뽑혔다”고 말했다.
이렇듯 학생들은 회장 선거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고 있다. 문제는 입시라는 목적에 눈이 가려져 돈을 들여가면서 학생들의 자율·자치 활동에 개입하는 학부모들과 이를 장삿속으로 이용하는 사회 풍조다. 교육의 본질 훼손으로도 모자라 스스로 리더를 선출하고 그 안에서 역할과 책임을 배워야 할 교육 현장을 혼란케 하고 황폐화시키는 일이다.
취재 결과 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자기소개 특강을 듣고 회장 선거 특강을 들으며 치열한 경쟁과 스펙 쌓기에 내몰리는 현실에 대해 학부모들은 대체로 한숨을 내쉬면서도 내 자녀만 도태시킬 수 없다며 따라가는 이중성을 보이고 있었다. 회장을 맡는 것은 리더십을 기르고 역할과 책임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다만 회장에 적합한 마음자세를 갖추고 준비부터 마무리까지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임할 때 비로소 실력이 되고 스펙이 된다는 것을 간과해선 안 된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