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과 한 울타리서 살고 싶어요”… 자활로 꿈꾸는 미래

지난 12일 낮 1시, 서울 용산구 서계동 ‘일·문화 카페’. 벽면 회칠이 벗겨진 건물의 낡은 계단을 따라 3층에 올라가니 ‘여성들의 열린 공간’이라는 간판이 눈에 띄었다. 열린복지 열린여성센터가 운영하는 여성 노숙인 공동작업장이다. 걸그룹 시크릿의 ‘샤이보이’가 울려 퍼지는 작업장 탁자에는 포장 안 한 귀고리가 잔뜩 쌓여 있다. 능숙한 손놀림은 아니지만 귀고리 한개 한개를 비닐에 넣는 여성들의 표정에는 간절함이 묻어났다. 삶의 수레바퀴에서 튕겨 나왔다가 자활에 나선 이들의 절실함이다.

‘개미일터’에서 희망을 품다

‘개미일터’ ‘희망일터’로 불리는 작업장에서 만난 정복영(가명·51)씨는 이혼한 남편과 사는 막내딸과 다시 살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5년 전 이혼한 후 노숙인이 된 정씨는 아가페 쉼터를 거쳐 정신장애 여성 자립공동체 ‘다정이네’에서 살고 있다. 지난해 11월 다정이네에 입소한 후 액세서리 포장 일을 시작해 한 달 15만원을 번다. “노숙할 때 서울역은 위험하다고 해서 가지 않고 염리동 놀이터에서 잤지요. 밤엔 계속 이동하고…. 먹는 것도 신통찮은데 날이 추워져서 쉼터에 갔죠.”

만화가인 남편이 10년간 일을 하지 않아 친정 도움으로 근근이 살았다. 정씨는 쌍둥이 남매와 막내딸을 뒀다. 스트레스로 정신분열증에 걸리면서 아이들과 사이가 틀어졌다. 그룹홈에서 독립하면 매입임대주택을 구해 딸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이 꿈이다. “공공근로로 1000만원을 모았는데 틀니를 하는 바람에 통장에 600만원밖에 안 남았어요.” 기자에게 한탄하듯 말하던 정씨는 “직장 다니는 딸과 두 주일 전 영화도 봤어요. 스물여섯인데 남자친구가 없어…”라며 걱정 어린 얼굴이다.

유난히 앳된 얼굴의 여성도 액세서리 포장에 열심이었다. 올해 스물한 살의 정소민(가명)씨. 서울역 주변을 5개월간 전전하다 열린여성센터와 연결돼 자활의 의지를 다지고 있다. 임시 주거시설인 고시원에 머물다 지금은 홍제동 쉼터에서 지낸다. “노숙자 데모할 때 서울역에서 오빠를 만났어요. 이제 100일째예요.” 정씨의 꿈은 남자친구다. 지난달 청약저축에 가입했고, 공공근로도 신청했다. 중학 3학년 때 학교를 떠난 그에게 남자친구는 “고입·대입 검정고시 다 시켜줄게”라고 약속했단다. 

일·문화카페 담당 오소영 사회복지사는 “여성 노숙인 중 절반은 가정폭력을 겪고, 학력도 낮고, 정신질환을 앓다 노숙으로 내몰린 경우”라며 “자활 의지가 강한 여성들은 식당이나 가사도우미로 새 삶을 꿈꾸지만 장시간 저임금 일자리를 유지하긴 쉽지 않다. 정신이 취약하고 체력도 나빠 주기적으로 돌아온다. 일종의 ‘회전문’ 현상”이라고 말했다. 공공근로나 서울시 일자리는 기간이 한시적이다. 서울시 일자리 근로를 하다 장기 고용되는 경우도 있으나 흔한 일은 아니다.

“의무적으로 월급 절반 저축”

특별자활근로는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여성들에게 ‘징검다리’ 같은 기능이 있다. 봉제공장 미싱사였던 김선의(가명·51)씨는 2003년 이혼한 후 쉼터에 입주했다. 중간에 남편과 재결합해 일산에서 살았으나 다시 내쫓겼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김씨는 쉼터 구내식당에서 주방보조로 일한다. 한 달 60시간을 채우면 30만3000원이 통장에 찍힌다. 이 쉼터에선 자활근로 여성이 의무적으로 월급 절반을 저축해야 한다. 김씨는 “차비에, 병원비에 월급 절반은 쓴다. 그래도 통장 보면 기분이 좋아져 ‘열심히 일해야지’ 다짐한다”며 웃었다. 그는 내년까지 자활근로를 할 생각이다.

서울역 노숙인 강제퇴거 조치 이후 여성 노숙인들은 동대문시장 근처로 많이 옮겨갔다고 한다. 쉼터에 20∼30대 여성이 늘고 있는 것도 새로운 추세다. 거리를 떠돌다 경찰이나 시민 신고로 쉼터에 입소하는 중장년 여성과 달리 10대 때 가출을 경험해 쉼터에 익숙한 이들에겐 고단한 몸을 누일 수 있는, 말 그대로 ‘쉼터’다. 쉼터가 자활로 이어지는 또 다른 문인 셈이다.

여성전용 응급 보호시설 없어

특히 여성 노숙인은 성폭력에 노출되므로 남성보다 더 큰 위기를 겪게 된다. 열린여성센터 쉼터 김용희 팀장은  “여성이 노숙을 하면 멀쩡한 회사원조차 ‘밥 사줄게’ ‘재워줄게’ 하며 성추행을 일삼는다. 거리에서 피곤해 누워 있으면 자기 여자 대하듯 옆자리로 파고든다”며 “남성 노숙인들에게 ‘돌림빵(강간)’을 당한 한 여성이 ‘맞아 죽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고 하더라”며 안타까워했다.

전문가들은 연중 24시간 체제로 운영되는 여성응급보호시설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 팀장은 “서울시내에 상담보호센터로 운영되는 남성 노숙인 응급보호시설이 5곳 있는 데 반해 여성 전용 시설은 단 한 군데도 없다”고 말했다. 시는 여성 노숙인 수가 적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여성 노숙인들은 밤마다 주차장이나 빌딩, 기도원, 교회 등으로 피해 다니므로 실태 조사로 수요가 파악되지 않는다. 이들을 보호할 사회보호망이 튼튼한지 다시 한 번 되짚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