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림동은 늘 붐빈다. 인구 밀집지역이라 학교도 많고 술집과 노래방도 차고 넘친다. 길 거리나 도림천 일대는 밤늦은 시간까지 십대들이 서성인다. 신림동의 늘어선 상점들에서 가출·아르바이트 청소년들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2010년 1월에 발족한 ‘좋은 세상을 만드는 사람들’은 작년 5월부터 거리의 십대들을 대상으로 거리 상담 ‘틴모빌’을 하고 있다. 이 단체는 정부지원 없이 회원들의 회비로 운영되는 동작지역의 풀뿌리 여성단체다. 상담은 성교육, 가출·성매매예방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자연히 여성청소년들의 자존감을 높이는 상담을 할 때가 많다. 날씨가 좋은 날은 신림역 주변 길거리에 부스를 차리고 상담을 한다. 쌀쌀한 날은 지하철 역사 안에서 아이들을 상담한다. 방명록에 적은 휴대전화 번호로 연락을 하면 십대들은 친구까지 데리고 온다. 8시부터 11시까지 30~40명의 십대들이 모인다. 찾아오는 청소년은 성매매 십대에서부터 중고등학교 학생들까지 다양하다. 날씨가 한층 차가워진 11월 17일 상담을 필요로 하는 십대들을 만났다.
신림역 1, 2번 출구 사이 공터에서 3~10월에는 매주 목요일, 11~2월까지는 2주에 한번 목요일에 '거리상담'을 진행한다.
일렬로 늘어선 6개의 플라스틱 탁자들마다 상담가 한 명과 학생 서넛이 앉아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통로쪽 탁자에 자리를 잡고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선생님이 학생들 앞에서 한 아이를 야단치고 있어. 이유가 뭘까?”, “숙제를 안 해왔거나 도둑 누명을 썼어요”, “이럴 때 기분이 어떨까?”, “우울해요. 최악이예요” 만화를 보고 이야기하는 이 부스의 이름은 ‘만화 속 비폭력 배움터’이다. 청소년 상담을 공부하고 있는 최미자씨는 “개인마다 그림을 보고 나타내는 반응이 다르다. 한번은 소주를 마시고 야단치는 아버지 그림을 보여주니, 한 아이가 ‘곱게 잠이나 자라. 너나 잘 해.’라는 말을 했다. 어른이라고 청소년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많이 배운다”며 “아이들은 생활 속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그림을 통해 뱉어낸다. 아버지가 폭력을 쓰는 장면을 보여주며 ‘이런 상황이 어느 정도인 것 같니?’라고 물으면 ‘100%인 것 같다’라는 말이 돌아온다. 실제로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아이들은 폭력을 많이 체감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비폭력 배움터, 공예만들기 부스, 전문상담가 부스 등에서 다양한 주제로 상담가들과 청소년들이 대화를 나눈다.
어떤 내용들이 상담에서 오고갈까. “학교가 끝나면 학원가기 바쁘고 수업은 수능위주로 돌아간다. 또 선생님들은 처리할 서류가 너무 많다. 개인적으로 누굴 붙들고 상담을 하겠나? 요즘 ‘완득이’라는 영화가 인기인데, 그런 선생님은 영화나 드라마 속에나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대학이 십대들의 최대 목표이다보니 부모들도 교육비 버느라 아이들의 심성을 돌볼 틈이 없다”며 십대에 대한 안타까움을 말했다. “밤 10~11시까지 거리를 배회하는 아이들을 많이 만났다. 우리의 목표는 따뜻한 한 마디말로 아이들의 마음을 녹여주는 것이다. 소중한 것을 느끼고 돌아가길 바란다”라며 대화를 통해 십대들의 마음이 편안해지길 바랬다.
학생들이 자리를 뜨자 옆 탁자로 시선이 옮겨졌다. ‘LGBT'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성전환자를 집합적으로 지칭하는 축약어)라고 적혀있는 팻말을 가운데 두고 네 명의 여학생이 상담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성소수자 친구들은 왕따를 당할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고 자신의 비밀을 말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여러분이 그 친구의 소중한 사람이기 때문이예요. 친구에게 거짓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죠. 그렇기 때문에 그런 말을 들었을 때, ‘고마워’라는 말을 해주었으면 해요”
10년 넘게 자신의 성정체성을 고민했다는 김진석(25)씨는 “지금 온 친구들은 긍정적인 편이다. 보통 성소수자에 대해 ‘더럽다’, ‘말리고 싶다’라는 말을 한다”며 “많은 성소수자 청소년들은 자신을 숨기고 살고 자기혐오에도 쉽게 빠진다. 이 친구들은 중학교를 자퇴한 경우도 많은데 어려서인지 취직이나 진로에 대한 고민도 거의 없다. 이런 십대들은 성소수자 모임에 나가거나 밤늦게까지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으로 시간을 보낸다”라고 성소수자 청소년들이 처한 열악한 환경을 지적했다. 많은 성소수자 청소년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없다. 그런 이유로 'LGBT'부스에 오면 자기가 좋아하는 친구의 이야기 등 평소 마음속에 담아둔 이야기를 마음껏하는 것이다. 김진석씨는 “움츠려서 왔다가 끝날 때 웃으면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보람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한 차례 십대들이 자리를 뜨고 나니 보드게임을 쌓아놓은 탁자가 눈에 띄었다. 이곳의 이름은 ‘멍부스’. 다른 부스가 다 차서 갈 곳이 없을 때 게임을 하면서 차례를 기다리는 부스란다. ‘멍부스’에서 또래상담을 하는 장명수(17)군은 중학교 상담 선생님과의 만남을 계기로 상담가를 꿈꾸게 되었다. 명수군과 같이 진로를 위해 자원봉사를 하는 십대도 있지만 상담을 받은 후 자신도 도움을 주고 싶어져서 상담에 참가하는 십대들도 많다.
이 외에도 공예를 배울 수 있는 ‘건강소녀’부스와 전문상담가에게 상담을 받을 수 있는 ‘링딩동’부스도 있다. 또 성에 대한 고정관념에 대해 토론하고 성매매 위험 대처법, 데이트 성폭력 예방, 피임법 등을 알려주는 ‘섹슈얼리티 부스’도 있다.
박신연숙 사무국장은 “거리는 마을의 연장이다. 우리 동네에도 괜찮은 어른들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지역의 아이들을 함께 키워나갔으면 한다”라며 지역 공동체의 청소년에 대해 관심을 촉구했다.
현재 중고등학교에서는 전문상담교사를 두는 것이 의무가 아니다. 그래서 전문상담교사가 없는 학교가 많다. 청소년의 삶이 성적과 입시위주로 돌아가다 보니, 공부에 관심이 없거나 학교를 다니지 않는 청소년은 사회의 관심 밖에 있다.
현재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들꽃청소년세상, 서울특별시 청소년일시쉼터, 청소년전화 1388에서도 거리 상담을 진행하고 있다. 마음에 불을 쬐고 싶다면 거리상담을 찾아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