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음악인생, 삶과 커리어의 균형에서 일궜죠”
‘정 트리오’로 동생들과 ‘따로 또 같이’ 호흡… ‘영원한 멘토’ 어머니 추모 음악회 준비 중
“단점에 집착하지 마라. 장점을 찾아내고 이를 업그레이드 시켜라” 제자들에게 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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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화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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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지 기자
늦가을 햇살이 화사한 오후, 북한산 자락에 위치한 한 카페에서 세계적인 첼리스트 정명화(67·사진)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를 만났다. 멋스러운 스카프에 가을 분위기를 한껏 담아온 그와 대화를 나누며 모든 일에 조화로운 ‘균형’을 이루고자 최선을 다한 것이 그의 행복한 음악인생의 비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자신도 “결국 모든 것은 밸런스(balance)다”라고 결론을 내리곤 했다.

지난 여름 역시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인 동생 정경화씨와 공동으로 대관령국제음악제의 예술감독을 맡아 행사를 성황리에 치러내 주목받은 그는 지난 5월 별세한 어머니 이원숙 여사를 기리기 위해 동생들(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지휘자 정명훈)과 함께 12월 추모 음악회를 한창 준비 중이다. 그는 “어머니의 영향을 뺀다면 내 음악인생은 없다”는 말로 어머니에 대한 절대적인 존경을 표했다.

“‘첼로’를 통해 내 목소리, 노래를 갖게 됐다”

“우리 7남매는 이상할 정도로 서로 사이가 좋은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어머니가 각자 아이들의 개성을 잘 파악하시고 서로 잘하는 것을 존중해주면서 누구 하나 주눅 드는 일 없도록 섬세히 배려해주신 덕분인 것 같다. 무엇보다 아이들의 시간 관리를 정말 잘 해주셨다. 생업을 위해 그 힘든 장사를 하시면서도 아이들의 스케줄을 일일이 다 기억하시고 차질 없도록 조정하셨다. 늘 하시던 말씀이 ‘자라나는 아이들의 1시간은 어른의 10시간 이상으로 귀하다’는 것으로, 그만큼 성장기의 시간 관리가 일생을 좌우한다고 믿으셨다. 우리들의 사소한 언행 하나도 정확히 파악하실 정도로 관찰력이 뛰어나셨고, 자녀 문제에 대해선 열 명이고 스무 명이고 전문가들에게 계속 자문을 구하실 정도로 열정적이셨다. 무엇보다 우리가 진정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깨닫고 선택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능력이 탁월하셨다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타고난 연주가는 아니었어도 듣는 것, 보는 것, 느낌 면에선 최고의 전문가였다.”

잘 알려져 있듯이, 그의 가족은 음악 가족이다. 6·25전쟁 당시 피아노부터 챙겨 피란을 갈 정도로 음악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부모님 덕분에 7남매는 모두 어려서부터 이런저런 악기를 시험해보고 즐겨 연주하곤 했다. 그의 아버지는 저녁 약속도 마다하고 귀가해 아이들의 연주를 즐길 정도였고, 여름이면 온 가족이 대천해수욕장에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면서 모래사장에서 합주도 하고 저녁노을을 무대로 가족음악회를 열곤 하던 추억을 그는 즐겁게 기억한다. 원래 성악가를 꿈꾸었던 그 역시 어머니의 권유로 피아노, 바이올린을 거쳐 첼로에 흠뻑 빠졌다.

“연주자에게 악기는 자신의 목소리다. 어떤 악기를 만나느냐는 것은 운명이고. 처음엔 성악하기를 원했는데, 변성기가 되니 왠지 점점 목소리에 자신감이 없어졌다. 반면 첼로는 무척이나 신났다. 무엇보다 첼로는 소프라노, 테너, 베이스 등 음을 내는 사람의 목소리와 가장 가깝고, 그 비브라토로 독특한 색깔을 만들어내면서 단음 표현도 자연스러워 많이 끌렸다. 그런데 이건 사람마다 다른가보다. 동생 경화는 바이올린이 가장 사람의 음성과 가깝다 하고, 명훈이는 화음을 만들어낸다는 면에서 피아노에 매혹됐으니까.”

그에게 가장 인상적인 연주는 무엇일까.

“나는 첼로를 통해 ‘노래’를 부른다고 생각한다. 사실 누구나 마음속에 노래를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이 첼로 노래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면, 그래서 내 연주의 어느 한 자락이 청중의 가슴에 정확히 가 닿을 수 있다면 내겐 그것이 바로 행복한 연주회다. 지금도 기억난다. 제네바 국제음악콩쿠르(1971년 동생 정명훈씨를 반주자로 동반하고 참가해 첼로 부문에서 1위를 수상했다) 당시 2차 시험은 독주회처럼 청중이 있는 상태에서 진행됐는데, 그때 콩쿠르를 한다는 생각보다는 사람들에게 내 마음을 전하고 싶어 열심히 연주했다. 그 때문에 연주 후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던 것을 아직도 기억한다.”

“슬럼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정 패밀리·구 패밀리 서포트 덕”

그는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커리어로 유명해지려고만 한다면 불행해지는 경우가 꽤 있다”며 “음악을 하는 것은 결국 행복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냐”고 반문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 행복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바로 “모든 일에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때문에 연주 활동과 가정생활과의 조화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가령 해외 연주도 가급적이면 2주 이내로 일정을 잡고, 그 외엔 레슨도 자제하며 최대한 가족과 함께 보내려고 노력해왔다. 두 딸이 한창 어릴 때 그가 “엄마가 연주 여행으로 집을 많이 비우는 것 같니?”라고 물어본 적이 있다. 아이들에게선 “연주회 때만 빼놓고는 늘 우리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엄마가 맛있는 것 해놓고 우리를 기다렸잖아요”라는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그는 집에 있을 땐 가족에게 집중했지만, 일단 연주를 하러 떠나면 일부러 집에 전화를 안 했다. 아이들은 자연스레 ‘엄마는 연주해야 하는 사람’이란 사실을 받아들이고, 집에 있을 때도 그의 연습을 방해하지 않게 되었다.

그는 스승이었던 피아티고르스키로부터 “가족을 가지고 행복한 생활을 꾸리며 연주활동을 하라”는 조언을 듣곤 했다. 본격적으로 데뷔해 1년쯤 연주를 다니다 보니 결혼도 다 때가 있는데 이러다 놓치면 어쩌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연주회 일정을 조정하고 여러 모임에도 열심히 참석하다가 AP통신 기자로 활동하던 지금의 남편(구삼열 여수엑스포 유엔특별 대표)을 만났다. 그는 “당시 커리어우먼은 남자들에게 막연한 두려움의 대상이었기에 내게 프러포즈를 하는 남자들은 대통령을 꿈꾼다든지 하는 정치적 성향을 가진 극소수 남자들만이었다”고 말하며 웃었다. “나를 겁내지도 않고, 내 일을 존중해주고, 음악을 좋아하는 데다가 국제적 감각까지 갖춘 남자를 만난 것은 행운이다”라고 회상하는 그는 특히 남편이 자신의 일을 굉장히 좋아하고 행복해하는 데 크게 끌렸다고 한다.

“우리의 평등부부 비결? 그건 서로의 일을 존중해주는 것이다. 남편 입장에서도 자신의 일을 제대로 못 해 늘 불행한 와이프보다는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며 사는 행복한 와이프가 낫지 않겠는가.”

그는 “자기 파악을 잘해야 쓸데없는 욕심을 자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왜 발전의  원동력이 될 욕심이 없겠는가. 그러나 과잉 욕심보다는 조화로운 균형을 우선하기에 그는 자신의 욕심을 ‘골(goal·목표)’로 설정하고, 이 골을 큰 것은 물론이고 사소한 몇 가지 등을 섞어 다양하게 구성한다고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어느 하나에만 너무 집중해 지나친 실망과 좌절을 맛보는 것을 경계하면서 차근차근 목표를 성취해나갈 수 있도록 신경 쓴다고 한다. 이렇게 치밀하게 모든 것을 조정해나가는 그이지만 슬럼프는 피할 수 없었다. 30대 후반 어느 정도 안정기에 갑자기 찾아온 슬럼프로 그는 딱 1주일간 첼로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가 이 슬럼프를 딛고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의논 상대가 돼주고 이해와 배려를 아끼지 않은 “정 패밀리, 구 패밀리의 지원” 덕분이었다.

“때때로 멈춰 서서 다시 정리하라”

“로마에서 살 때였다고 기억된다. 당시 육아·가사 도우미도 다 있고, 열심히 내 일에만 매진할 수 있는 그런 좋은 환경이었는데도,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그런 정체된 느낌 때문에 좌절을 겪었다. 20대 때는 마냥 올라갈 수만 있을 것 같았는데, 30대가 되니 새로운 길이 잘 안 보이고… 열심히 하다 보니 욕심은 더 생기는데 나타나는 것은 별로 없는 것 같고. 그런데 선생님께서 ‘바로 그때가 역량이 느는 단계’라고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슬럼프가 왔을 때 무리해서 올라가려고만 하지 말고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후에 힘이 된다고 하시면서 말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때 겪은 슬럼프의 힘으로 지금까지 즐겁게 연주를 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어쨌든 당시 첼로에 손을 대지 않으니 아이들도 ‘엄마, 왜 안 해?’ 하고 조르고, 나 자신도 마치 ‘밥’을 먹지 않고 지내는 것 같아 다시 악기를 꺼내들었다.”

“박자 안의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그는 제자들에게 늘 말하곤 한다. 음악엔 흐름이 있고, 그 흐름의 표현이 중요하기에 이를 위해선 작고 큰 계획을 세밀하게 잘 세워놓아야 한다고. 동시에 “너무 앞만 보고 가다 보면 길을 잃을 수 있으니 때때로 멈춰 서서 다시 정리하라”는 경계성 조언도 잊지 않는다.

“흔한 말이지만, 유명해지려고 음악을 하면 그것은 잘못된 시작이라고 말하곤 한다. 음악을 깊이 있게 알고 즐기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 어떻게 하면 작곡가가 기가 막히게 쓴 표현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을까, 이를 통해 어떻게 음악적 기쁨을 줄 수 있을까를 늘 고민하라고 한다. 구체적으론 스스로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꾸 찾아내고 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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