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의미와 무의미를 묻다

 

원로배우 백성희씨가 연습실에서 열연을 펼쳐보이고 있다. ⓒ코르코르다움 제공
원로배우 백성희씨가 연습실에서 열연을 펼쳐보이고 있다. ⓒ코르코르다움 제공
모래성을 쌓고 있는 여자. 남자가 천천히 다가가 여자가 만들어 놓은 모래성을 어루만진다. 마주본 두 남녀. 여자는 이윽고 자기만의 공간으로 도망이라도 치려는 듯 나뭇가지로 자신을 둘러싼 공간에 둥그런 원을 그린다. 원 밖의 남자는 눈을 가리고 여자가 친 결계를 넘어서 마침내 여자에게 닿는다. 머리를 어루만지던 손은 배로, 가슴으로 감기고 이윽고 남녀는 엉겨든다. 그러나 이도 잠시 둘은 서로에게서 떨어지고 다른 곳을 응시한다. 그리고 다시 가방을 들고 어디론가 자신만의 길을 찾아 떠난다.

9월 27일 오후 서울 문래예술공장에 위치한 침묵극 ‘모래의 정거장’의 연습실을 찾았다. 마침 중견 배우 남명렬을 위시로 한 출연자들이 극의 한 장면을 열연하고 있다. 배우들은 모래알처럼 가벼운 움직임으로 무대를 걷고 있다. 성량이 큰 배우들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내는 다른 연극의 연습실과는 달리 이곳은 환풍기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하다. 마치 침묵이 세상에 말을 걸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극은 인생을 정거장에 머물렀다 가는 여정으로 그린다. 거대한 원형의 모래 무대에서 남녀는 만남과 이별을 반복한다. 정거장에서 만나고, 사랑하고, 이별하는 이들은 우주를 떠도는 여행자다. 인간의 삶과 죽음, 생성과 소멸의 순환을 통해 생명의 유한성을 극대화하고 존재의 의미와 무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작품은 철학가이기도 한 일본의 오타 쇼고의 ‘정거장’ 연작의 일부다. 극단 무천의 대표인 김아라씨는 오타의 정거장 시리즈에 도전해 4년에 걸쳐 4부작을 선보이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선보이고 있다. 이미 ‘물의 정거장’ ‘바람의 정거장’을 통해 뛰어난 예술적 감성과 철학, 새로운 공간미학적 실험을 선보인 바 있다. 이 때문에 ‘모래의 정거장’은 2010 세계국립극장페스티벌의 국내 우수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작품은 한·일 연극사에 길이 남을 국보급 배우들의 총출동이라는 점만으로도 이미 공연계의 핫이슈로 떠올랐다. 한국을 대표하는 원로배우 백성희·권성덕씨를 비롯해 작품마다 열정적인 연기로 뚜렷한 캐릭터를 창출하는 박정자씨, 지적인 해설과 섬세한 표현의 남명렬씨 등 국내 최고의 배우들이 출연한다. 일본의 대표 선수는 일본 TV드라마 ‘하얀거탑’으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시나가와 도오루와 일본의 거장 감독 기타노 다케시 작품의 대표 배우로 유명한 오스기 렌 등이다. 

에피소드나 대사 없이 움직임만으로 구성된 데다 실존의 무의미성이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를 담고 있지만 작품은 어렵거나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생생한 날것으로서의 생명력과 호소력을 자랑한다. 물론 연출가의 의도를 무대에 생생하게 재현하는 배우들 덕이다.

국가와 문화를 뛰어넘어, 연극으로 하나가 된 한·일 예술가들의 무대인 ‘모래의 정거장’은 10월 7일, 8일 국립극장 KB청소년하늘극장에서 공연된다. 티켓은 3만~5만원. 문의 02-889-3561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