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차 세계여성회의를 전후하여 국제무대에서 필리핀 여성들의 활약은 대단했다. 국가적으로 필리핀의 경제력이나 국제적 위상은 낮았지만 유창한 영어와 집요한 열정으로 유엔의 각종 회의에서 이슈를 제기하고 의장단에 진출하는가 하면 비정부기구 간 NGO 포럼을 주도했다. 유엔의 여성지위위원회에 참석하는 필리핀 대표단의 면면을 보면 대사, 대학 총장, 기업인 등 다양했다. 필리핀의 여성정책 전담 기구인 필리핀여성역할국가위원회(NCRPW)는 적어도 아·태 지역에서는 명성이 높았다. 

세계의 여성문제를 총괄하는 유엔 여성지위위원회 의장에도 필리핀 대표가 선출됐다. 세계여성회의를 앞두고 뉴욕의 유엔본부에서 열린 제39차 유엔 여성지위위원회는 필리핀 출신의 패트리샤 리쿠아난을 새로운 의장으로 맞았다. 1995년 3월 15일 오전, 의장의 개회 선언으로 시작된 개회식에서 리쿠아난 의장은 즉석에서 잠시 묵념을 하자고 제안했다. 싱가포르에서 가정부로 일하던 필리핀 출신 여성이 억울하게 살인혐의로 기소되어 이틀 후 예정된 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으니 자매애를 발휘해 그녀를 위해 묵념을 하자는 것이었다. 나아가 여성지위위원회가 인도적인 견지에서 형 집행을 유보하도록 개입할 것을 제안했다.

별다른 문제 제기 없이 참가자들이 묵념을 하려는 순간 연락을 받고 회의장에 달려온 유엔 주재 싱가포르 대사가 의사진행 발언을 통해 이 문제는 필리핀과 싱가포르 양국 간 협의해야 될 사항이지 여성지위위원회에서 다룰 사항이 아니라고 반대했다. 여성지위위원회가 개입해 묵념을 할 권한이 있는 것인지를 따져 물었다. 긴장감이 도는 가운데 의장단은 어찌할지를 의논하고 있는데 의장단에 배석해 있던 유엔 사무국 간사가 이에 대한 법적인 권한이 있는지를 본부에 가서 확인하고 오겠다고 하면서 자리를 떴다. 회의장은 술렁거렸지만 차분히 결과를 기다렸다. 이윽고 간사가 확인한 결과를 가지고 회의장으로 들어왔다. 확인한 바, 여성지위위원회는 그 권한으로 묵념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회의에 참석한 각국 대표들은 싱가포르 대표단이 퇴장한 가운데 필리핀 가정부를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일동 묵념을 했다.

국제무대에서 필리핀 여성들은 자국의 여성들이 세계 각지로 나가 가정부 일을 하며 돈을 벌어 본국의 경제와 가계에 상당한 보탬이 되고 있음을 간과하지 않았다.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당당했다. 이후 필리핀은 가정부 문제를 비롯해 이주여성 근로자 문제를 글로벌 이슈로 세차게 제기해 유엔의 각종 결의안으로 이끌어내는 성과를 거두게 됐다. 올해 6월 국제노동기구(ILO) 제100차 총회에서는 가사노동협약이 채택되는 데까지 이르렀다. 필리핀 여성들의 힘은 거기에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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