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끝자락을 붙잡고 싶다면
“당신이 슬퍼하시기에 이별인 줄 알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던들 새가 울고 꽃이 피었겠습니까/ 당신의 슬픔은 이별의 거울입니다”
아침저녁으로 부는 시린 찬바람에 무심히 지나가는 여름을 붙잡고 싶은 서운한 마음이 든다면 이성복 시인의 시집 ‘그 여름의 끝’(문학과지성사)을 읽어보자.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라는 시구로 시작하는 동명의 시는 이성복 시인의 대표작 중 하나다. 폭풍을 이겨내고 여름을 무사히 난 백일홍은, 절망의 먼 길을 돌아온 시적 화자의 다른 모습이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즉 수많은 꽃망울들이 번갈아 피어 결국 한 계절을 온전히 담당하는 백일홍의 생태에 대한 묘사에서 여름의 끝이 곧 절망의 끝이기도 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시 한 편이 인생을 바꾼다
“최종병기시인훈련소에 들어서면 우선 ‘악’이라는 개 짖는 듯한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올 것이다. 최종병기시인훈련소에서는 ‘악’ 외에 다른 말은 없다. 그곳에서는 ‘네’도 ‘악’, ‘사랑해요’도 ‘악’, ‘배고파요’도 ‘악’이다. 한마디로 ‘악’ 한마디로 모든 의사소통을 꿈꾸는 시인공화국이다.”
-‘최종병기시인훈련소’ 일부
시인은 자신만의 계파나 리그를 만들어 패거리 문학을 하는 요즘 문단의 풍토를 교묘히 질타한다. 어찌 보면 당돌할 수도 있는 이 80년생 새파랗게 젊은 시인의 언어들은 화려한 미사여구 없이도 누구든 울컥하게 만들고 정신이 번쩍 들게 한다. 시인은 때로 세상과, 사회와, 사람과 싸우는 투사가 되기도 한다는 점을 절감하게 한다.
가을의 고독을 동반으로
“나는 즐긴다/ 장례식장의 커피처럼 무겁고 은은한 질문들을:/ 누군가를 정성 들여 쓰다듬을 때/ 그 누군가의 입장이 되어본다면 얼마나 서글플까/ 언제나 누군가를 환영할 준비가 된 고독은 가짜 고독일까/ 일촉즉발의 순간들로 이루어진 삶은/ 전체적으로는 왜 지루할까?”
-‘의문들’ 중에서
이렇게 나온 두 번째 시집 ‘눈앞에 없는 사람’(문학과지성사)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술의 적요한 고독이 아니라 타인의 손을 맞잡는 것임을 역설하는 시들로 가득하다. 쓸모 있는 것을 만드는 노동이 아니라 쓸모없는 것을 만드는 사랑의 활동을 통해 타인의 손을 맞잡고 소요와 동반으로 나를 변화시키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시 알레르기’, 시집이 어렵다면
시인이 발품을 팔아가며 직접 만난 시인들은 김지하, 도종환, 강은교, 고은, 이해인, 정호승, 김용택, 안도현 등이다. 시인 선정에 있어서는 시의 완성도와 시인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 양쪽에 무게를 뒀는데, 완성도가 떨어지는 시를 독자에게 권할 수는 없었으며, 이야기가 있는 시인의 시가 독자들이 다가가기 쉬웠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