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1991년, 극단 학전이 문을 열던 봄, 나는 느릿느릿 가는 20대의 삶을 지겨워하고 있었다. 80년대 중반에 대학을 다닌 나는 서슬 퍼런 이념의 칼날 앞에서 분명한 자기 색깔을 가지지 못한 미운오리새끼였다. 나는 지식과 머리로 이해하는 삶보다 몸으로 느껴지는 삶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심금을 울리는’ 감성이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세상은 답답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도 별로 없어 보였다.
그런 내가 대학로를 방황하며 나의 ‘심금을 울려줄’ 무언가를 찾고 있을 때 학전을 만났다. 학전은 대표 김민기의 조근 조근 읊조리는 노래처럼 ‘아하, 누가 그렇게 보여주고, 잡아주고, 그렇게 되었으면 좋을’ ‘저들에 푸르른 상록수’이고 ‘친구’였다. 지금 나의 친구 학전이 스무 살이 되었다.
#2.
이소라, 그녀를 처음 만난 건 1993년 가을 가수 한동준의 콘서트에서였다. 게스트로 나온 ‘낯선 사람들’의 멤버로 허스키한 목소리와 촌스런 외모로 낯설었던 그녀. 하지만 호소력 짙은 목소리가 기억에 남아 나를 설레게 했던 그녀.
재즈뮤지션 나윤선, 그땐 몰랐다. 학전에서 ‘지하철 1호선’에서 연변 처녀 ‘선녀’로 나왔을 때만 해도 그저 샹송을 잘 부르고 연변 사투리에는 어울리지 않는 너무나 고급스런 외모를 가졌다는 것밖에. 함께 나온 설경구, 방은진의 존재감이 더 크다고 느껴졌을 뿐. 그러나 록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은 온몸을 전율하게 만들 만큼 큰 문화적 충격이었다.
그리고 다시는 볼 수 없지만, 김광석의 노래로 내 서른 즈음을 보낼 수 있었고, 잘하지 못하는 노래를 자신 있게 부르는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 덕분에 노래에 의기소침해지지 않을 수 있었던 곳도 학전이었다. ‘차가운 너의 이별의 말’을 임지훈 덕에 견뎌낼 수 있었고 이병우의 기타 연주에 외로움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들국화, 강산에, 윤도현의 카리스마 빛나는 노래들을 들으며 스트레스를 날려버릴 수 있었던 곳도 학전이었다.
학전이 만들진 않았지만 클로저, 아트, 빨래와 같은 좋은 작품을 볼 수 있었다.
#3.
나는 오늘 다시 그녀들을, 그들을 만나러 아주 오랜만에 학전에 간다. 다시 ‘지하철 1호선’을 타고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에서 김민기의 오래된 친구들을 만나러 간다. 그리고 나의 딸과 함께 학전의 어린이 뮤지컬도 보러 갈 것이다. 20주년 기념 공연의 수익금으로 몇 년 전부터 해오고 있는 학전 어린이 무대를 더 잘 만들겠다고 하니 이 얼마나 학전스러운가. 그런 기대에 학전을 향해 가는 나의 발걸음에 힘이 붙는다. 학전 20주년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