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 외교에 ‘여성’ 역량 발휘 기대
아이들 일터에 데려와 엄마의 특수 임무 이해시켜
“특수 직업일수록 가족 구성원의 공감대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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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준범 객원기자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한·미 연합훈련 ‘키 리졸브’(Key Resolve)를 일주일 남짓 앞둔 2월 22일 오전, 국방부에서 송명순(53·여군 29기·사진) 정보본부 해외정보부 차장을 만났다. 상황도 긴박했지만 전투복 차림의 여군을, 그것도 ‘스타’를 단 준장을 만난다는 것은 참신한 충격이었다. 철통 보안을 유지해야 하는 업무 특성상 몇 차례의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닿은 그의 집무실은 상상 외로 소박하고 좁아 야전사령관실을 방불케 했다. 꼭 필요한 것만 있어야 할 자리에 긴장감 있게 자리 잡고 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지난 연말 전투병과 첫 여성 장군으로 진급해 관심의 초점이 됐던 송 준장과의 첫 단독 인터뷰는 지난해 여군 창설 60주년을 기점으로 여군의 역사가 중대한 전환점을 맞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그가 지난 연말부터 줄기차게 들어온 말 역시 “잘 해야 한다”는 당부와 기대였다.

“We′re all proud of you”

각계 여성들로부터 축하인사 받아

“진급 후 들은 가장 인상 깊은 축하 인사요? 어떤 여성계 인사가 그러시더군요. ‘I′m proud of you, we′re all proud of you’라고요. 때론 영어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가 더 클 때도 있죠. 사실 대통령께선 2~3년 전부터 전투병과에서도 여성 장성이 나올 수 있다는 말씀을 해오셨고, 여군 수가 6000여 명에 이른 만큼 각자 조직에서 성과와 기여가 커지고 있는 상황이긴 했지만 이런 영광이 내게 뚝 떨어질 줄은 몰랐어요. 진급 발표를 듣는 순간 전투병과 여군으로 장성 반열에 오른 것은, 말하자면 이제야 남성과 동등한 성적표를 받아든 것에 비유할 수 있겠죠.”

개인적으론 준장 진급 이후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일까.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줬다는 느낌을 만끽했습니다. 동료 군인들뿐만 아니라 군인 가족,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여성들도 ‘진급해줘서 정말 고맙다’ ‘속이 다 시원하다’고 격려해주셨습니다. 여성 보병 장군이 기대했던 만큼 제 역할을 다해줄 것인가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키는 것은 이제 내 몫이죠. 그래서 기쁨도 잠시, 많이 부담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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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보직으로 받은 ‘해외정보부 차장’의 임무는 국제 및 주변국의 안보 정세를 판단하고, 주변국의 대 한반도 정책과 전략을 분석하며, 국방정책, 외교, 군수, 방위산업 등에 대해 해외 정보로 지원하는 일이다. 여기에 주외 한국 무관 및 주한 외국 무관과도 끊임없이 소통하며 업무를 추진한다.

“미군조차도 여군 보병을 가지고 있지 않을 정도로 여군 보병을 가진 나라는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한 외국 무관들을 만나면 보병분과에서 여성 장성을 배출한 것이 획기적인 결정이라며 많은 관심을 표하곤 합니다. 군사적 외교에 여성 특유의 강점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최근 북한과의 초긴장 상황에 대해 평화주의자들의 염려가 크다며 군이 좀 더 유연하게 나올 수 없느냐는 질문에 그의 입장은 단호했다. 군의 본연은 “싸워 이기는 집단”이라는 것.

“국방은 국방 차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군인이 아닌 정치가라면 전략적으로 대화와 외교를 통해 사태를 완화시키려 노력하겠죠. 그러나 군사적 측면에서 보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현재의 시점에선 강한 군대, 전투형 군대가 북한에 대한 답입니다. 현존 전력을 극대화하고 대비 태세를 강화하며 정신 무장을 철저히 해야 합니다. 한·미 간 전략적 동맹을 발전시키고 국방외교의 외연을 확대하며 품위 있게 북의 도발에 대응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송 준장은 군이 외따로 떨어져 있는 조직이 아니라 우리 사회 속에 존재하기에 합리적으로 변화해야 할 당위성을 강조했다.

“전형적인 신세대 군인들에 대해 군에 오랫동안 몸담으며 ‘(무조건) 나를 따르라’란 분위기에 익숙했던 이들은 거부감을 가질 수도 있겠죠. 대부분 외동이라 할 말 또박또박 다 하고 자기 주장과 개성이 강하며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과 이해가 없으면 군의 명령이라도 잘 움직이려 하지 않는 신세대의 잠재력을 군이 제대로 이해하고 발전시켜야 합니다.

일·가정 균형 잡기

가장 어려웠다

그가 1981년 임관하고 30여 년 군 생활 동안 겪은 어려움은 다른 직장 여성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일과 가정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었죠. 군이 다른 직장과 다른 게 훈련부터 시작해 보직이 1년에서 1년 반 단위로 바뀌고 부대도 바뀌는 거예요. 그때마다 이사를 해야 했고 아이를 데리고 갈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해야 했습니다. 훈련에 야근에 24시간 근무해야 해서 이를 못 이겨 아까운 후배들이 군을 떠나기도 했죠. 다행히 부부 군인이기에(그의 남편은 육군 헬기 조종사로 10월 전역 예정이다) 외조는 제대로 받았죠.

난 고민하는 후배들에게 ‘일정 기간 사회에 취직해도 반드시 투자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아웃풋이 나온다’고 격려하곤 합니다. 당장 그 시기 자체가 어렵다고 포기하지 말고 위기를 슬기롭게 넘기도록 주변에 도움을 많이 청하라고도 하죠.”

그는 “나는 힘들고 어려우니 이건 못 해가 아니라 부분적으로라도 ‘한다’는 생각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부대를 옮길 때마다 아이들을 자신의 일터로 데려와 엄마가 하는 일이 어떤 일인지,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 충분히 보여주고자 노력했다.

“현재 정치외교학을 전공하는 대학 4학년 딸과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아들을 뒀는데, 작은 놈의 경우엔 유치원 때 내가 여군 대대장을 할 때부터 군대에 데려와 하는 일을 보여주곤 했어요. 식목일 등 행사 때면 여군 후배들의 아이들도 함께 데려와 부대 개방 행사를 했죠. 야근할 때도 이렇게 중요한 일이니 엄마가 야근을 해야 한다며 아이들 이해를 구했죠. 한마디로 아빠가 하는 일만큼 엄마가 하는 일도 중요하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해줬어요. 이런 특수한 직업일수록 가족 구성원 간 공감대 형성이 굉장히 큰 견인차가 되죠. 그래야 웬만한 일은 가족끼리 참아주고 또 이해하게 돼요.”

이런 그에게도 3번 정도 위기가 있었다. 첫 번째는 첫아이를 낳고 닥쳐온 육아 고민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소령일 때 “과연 내가 이 직업을 끝까지 잘 해서 나도 만족하고 주변 사람들도 만족시킬 수 있을까”라는 역할 모델로서의 고민 때문이었다. 마지막 세 번째 고민은 연합사에서 중령으로 근무할 당시 시부모 두 분이 연이어 암 투병을 할 때였다.

“한 번도 며느리로서 역할을 못해봤어요. 그분들 눈엔 만날 아들만 굶기는 것 같았겠죠… ‘아, 저 분들이 암으로 오래 못 사실 텐데 가시기 전에라도 며느리 역할을 온전히 하고 싶다’는 생각을 참 많이 했어요.”

전역 고민 속에 빠진 그를 붙잡은 것은 바로 상사들이었다. 남편은 철저히 ‘중립적’으로 그의 결정을 존중한다는 입장이었지만 선배 멘토들은 달랐다.

“그 분들은 그러셨죠. ‘남들이 다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지 마라,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네가 기여할 수 있는 몫도 상당히 크다’고요. 시간과 보직을 조정하며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어요. 군 조직과 궁합이 잘 맞았다고나 할까요? 조직과 개인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여길 떠나면 꼭 배신하는 것 같은 느낌, 조직이 나한테 거는 기대 때문에 늘 초심을 기억하고 발전을 향해 나아간다는 그런 확신이 드는 거죠.”

그래서인지 그는 요즘 같은 취업난에 안정된 직장, 안정된 보수라는 생각으로 군에 지원하겠다는 여성이 있다면 “일단 말리고 보겠다”고 한다. 그런 이유만으로 군을 택한다면 개인으로서 잃어야 할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란다.

세 번의 전역 위기

선배들의 격려로 넘겨

“다른 직장도 그렇겠지만 특히 군은 사명감이 없으면 버티지 못할 조직이죠. 특히 군을 택하는 여성들은 누가 오라고 해서 가는 것도 아니고 직장으로 ‘선택’했기에 초심이 더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군인이란 직업은 군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눈 뜨고 잠들 때까지 뛰고 구보하는 것”이라고 단적으로 표현하는 그는 타고난 체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초중등학교 때는 단거리 허들 선수로 전국체전 출전 경험도  있다. 이런 꾸준한 운동이 군 생활 초기 적응에 상당이 많은 도움을 준 것도 사실이다.

그는 영남대 정치외교학과(76학번) 출신이다. 대학 시절 당시 딱히 군인을 직업으로 선택하지 않았으면서도 졸업 논문의 주제는 일본의 자위대에 관한 것이었다. 당시 자위대의 구조부터 한·일 관계에 있어 자위대의 순기능적 역할과 우리 군이 자위대와 어떤 협력 관계를 맺어야 주변국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까 등이 논문의 주요 내용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교수님의 “넌 하필 여학생이 그런 주제를 택하느냐”는 핀잔을 들으면서도 순전히 “재미 삼아” 택한 논문 주제였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군대에 오려고 미리 정지 작업한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 정도로 우연이 아닌 필연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그는 자신의 운전병에게 스스럼없이 “우리 아들”이라고 불러 기자를 착각하게 했고, 여비서를 “보좌관”이라고 자연스럽게 추어올리곤 했다. 그의 휴대전화 컬러링은 8년째 로라 존스의 감미로운 팝송이다. 누군가 몇 차례 “이젠 컬러링도 군가로 바꾸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에 단호히 그럴 필요를 못 느낀다고 답했다고 한다. 그의 유연한 리더십에서 대한민국 군대에 소프트 파워의 여성 장군이 일으킬 변화가 흥미롭게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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