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란 많은 이들에게 팍팍한 현실을 잠시나마 잊게 해 주지만 ‘집 나가서 하는 고생’을 ‘돈만 있으면 왕처럼 대접 받을 수 있는 기회’로 만들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고생’ 없이는 안 되는 것임을 알고 있기에 나에게 여행은 늘 조심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타인과 환경에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누군가와 긍정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공정여행’은 나에게 길을 떠날 용기를 심어주었다. 여자 혼자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주변 사람들에게 걱정을 끼치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미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 길 위에 당당하게 서 있는 ‘용감한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고 있었기에 나는 두렵지 않았다.
그렇게 나의 여행은 시작됐다. 길 위에 선 그 때, 외국에 나가서야 더 많은 한국인을 만나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MP3 플레이어를 내려놓으면 더 많은 음악이 들리고, 컴퓨터와 휴대전화를 끄면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는 것이 아이러니했다. 세계 곳곳에 있는 호텔 체인과 으리으리한 고급 리조트들이 그 건물 자리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을 어떻게 빈곤하게 만드는지, 어떻게 착취하는지를 ‘모르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채, 70일간의 길지 않은 여행을 정리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대형 비행기가 뿜어내는 탄소 배출량으로부터 조금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 바로 ‘국내에서의 공정여행’이라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관심을 가지고 있을 때 ‘가배울’을 만났다. 가배울은 공정여행과 생협을 통해 남도 살리기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가배울은 추석의 옛말 ‘가배’와 울타리의 ‘울’을 합친 말로, 온 마을이 하나가 되어 길쌈(베 짜기)을 하고 노래와 춤을 추며 즐긴 신라의 여성 축제문화에 그 기원을 둔다. 함께 즐기고 만끽하는 공동체적 문화를 지향한다는 뜻을 가지고 남도의 문화와 지역을 ‘살림’하는 단체다.
산죽바람길
가배울의 첫 시작점인 전남 강진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다. 걷기를 좋아하는 여행자들, 자연의 풍광을 감상할 줄 아는 여행자들이 좋아할 만한 그런 곳이다. 무위사에서 백운동을 거쳐 월남사 터까지 걷는 동안 눈앞에 펼쳐진 광활한 차 밭은 그 끝을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강진의 백련사에서 내려다보이는 구강포 강진만의 모습은 참 평화롭다. 스님이 내어주시는 따스한 차 한 잔의 향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풍광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백련사에서 다산초당까지 걷는 길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3월 무렵 붉은 꽃이 만개할 때뿐 아니라, 꽃이 질 때 커다란 동백꽃 꽃망울이 통째로 ‘툭’ 소리를 내면서 떨어져 붉은 융단을 만든다는 동백나무 숲은 가을이나 겨울에도 다른 색 옷을 입고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산죽 바람길’은 한 걸음 한 걸음 시선을 돌릴 때마다 시시각각 다른 풍광이 나타나고 또 상쾌한 바람이 불어온다. 길지 않은 코스에서 그렇게 많은 광경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정말 신기하고 이채롭다.
강진만의 물빛은 말 그대로 청잣빛이다. 고려청자로 유명한 이곳과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색이다. 강진고려청자박물관에 가면 고운 빛의 청자는 말할 것도 없고, 청자를 주제로 한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과 전시작품들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매번 강진에 갈 때마다 새로운 모습에 감탄하는 나는 많은 여성이 이곳의 진정한 멋과 맛을 즐길 수 있길 소망한다.
백련사 다도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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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강진을 찾는 여행자로서 더 많은 곳을 걷고 싶고, 그 곳의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다. 청잣빛이 고운 물가, 철새가 날아든다는 논둑길을 천천히 걸으며 바람의 냄새를 맡고 싶다. 그런데 그렇게 걷다보면 남도의 맛깔 나는 음식을 먹고 싶을 것이고, 소박하지만 할머니의 아랫목 같은 포근한 잠자리가 필요할 것이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여행자를 위해 가배울은 올 한 해 동안 강진의 옛길을 잇는 ‘해찰길’을 탐사할 예정이다. 길을 이으면서 그 곳에 대한 정보(숙박, 음식점, 편의시설 등)를 모으고, 안전한 여행을 위한 이정표와 길 정비도 해야 할 일이다. 제주에는 ‘올레길’이 있고, 지리산에는 ‘둘레길’이 있고, 강릉에는 ‘바우길’이 있으니, 그 길들에 버금가는 강진의 여행길을 내고자 한다. 수려한 풍광은 두 말 하면 입이 아프고, 유기농법을 이용한 건강 식재료의 생산자를 직접 만나볼 수 있는 그런 길. 남도 어머니 장인들의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맛깔 나는 음식들과 함께할 수 있고, 남도만의 살아있는 토착 문화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그런 길을 사람들과 함께 걷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