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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알선업체인 유로모드는 각종 의류만을 전문으로 취급하고 있다. 2년

전만 해도 한 해 2천3백만불어치를 수출했는데 올해는 거래선이 조금 줄

었고 단가도 낮아져 1천4백만불에 그치고 말았다.

수출물량의 90%를 프랑스와 거래하고 있는 유로모드의 강은수(38) 사장

은 “앞으로 최대 2천5백만불을 목표로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열심히 뛰

겠다는 각오”가 대단하다.

10년 전까지만해도 수출알선업체의 일은 적어도 남들이 보기에는 앉아서

거저 먹는 사업으로 알았다. 구매자와 제조업체를 연결해 주고 언어소통

만 원활하게 도와주면 더이상의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90% 프랑스와 거래 1년전 동향 미리 파악

그러나 지금은 그런 식의 수동적인 자세였다가는 회사 문닫는 것은 시간

문제다. 강은수 사장은 좀더 전문화된 영역으로까지 손을 뻗침으로써 바

이어가 오기만을 기다리지 않고 주문을 유도하고 있다.

원부자재가격이 좀 더 싼 곳, 인건비가 저렴한 봉제공장을 알아보기 위

해 국내외를 뒤져야 하고 품질관리는 당연한 업무가 되었다. 가령 대만에

서 원자재를 구입해 인도네시아나 방글라데시 공장에서 제품을 만들어 프

랑스로 직접 수출하는 식이다.

요즘 강은수 사장은 다음 계절에 유행할만한 의류를 물색하러 유럽 땅을

밟는 일이 잦아졌다. 이번 여름에도 겨울 옷을 수집하러 네델란드와 영국

등을 돌아다니며 각종 의류를 수집해 왔다. 색다른 디자인의 의류가 있으

면 프랑스 바이어에게 직접 주문을 받기 위한 협상을 벌인다.

“실제 팔리는 계절보다 1년 전에 미리 동향을 파악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사실 이 일은 바이어가 해야 할 일이지만 그 역할의 일부를 우

리가 해줌으로써 오더를 유도하는 것이죠.”

출장가방의 무게만도 80킬로그램에서 1백킬로그램이 넘다보니 출입국마다

세관원과 실랑이를 벌여야 하는 일이 강은수 사장을 가장 고역스럽게 한

다. 구입한 옷갑만도 3천불이 넘으니 자연히 세관원에게는 보따리 장사,

심하면 밀수꾼으로 오해를 받기 십상이다. 강은수씨는 이미 세관의 블랙

리스트에 올라있는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 일부 베테랑 세관원을 만나면

수출상담에 필요한 오리지널 샘플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보고 쉽게 통과되

지만 그렇지 않은 세관원을 만날 때가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출장가방 80~100㎏ 세관원과 매번 실랑이

이러한 불편함은 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방콕 공항을 통과할 때는 여지

없이 중국계 밀수꾼 취급을 받는 것이다. 동양계 여성에 대한 편견이 심

한 외국 공항에서는 억울한 세금을 낸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상담을 위

해 입국하면서 가져간 견본품 때문에 세금을 냈고 김포공항에 입국하면서

또 세금을 낸 것이다. 같이 동행한 남성이 아무리 큰 짐을 갖고 있어도

별다른 짐검사를 하지 않는 것을 보고 강은수씨가 느낀 비애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더구나 다음날 바이어와의 상담에 필요한 견본품을 압수당하는

일까지 있었다.

“고가 브랜드는 경기변동에 영향을 받지만 저희는 중저가 소비재성 의류

만을 취급하기 때문에 불황을 타지 않습니다. 해당 시장이 원하는 가격만

맞춰주면 되니까요. 결국 스스로 경쟁력을 얼마만큼 키워가느냐가 성공의

열쇠라고 생각해요.”

거래국이 프랑스만으로 한정되어 있는 것에 대해서도 다른 에이젼트와 다

른 유모로드의 차별화 전략이다.

“유럽 내에서도 나라마다 의류에 대한 성향과 비지니스 방법이 다 틀립

니다. 여러 나라의 바이어와 거래를 트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죠.

그러나 거래국이 많은 것보다 한 나라를 집중 공략하는 것이 훨씬 더 전

문성을 갖고 관리하기가 편합니다.”

홍익대 미대 출신인 강은수씨는 개인적인 성향과 프랑스 사람들의 작업

방식이 감성적인 부분에서 궁합이 잘 맞기 때문에 외국인과 일하면서 부

딪치는 문화적 차이를 쉽게 극복할 수 있다고 털어 놓는다.

창립 5년째를 맞아 유로모드가 처음으로 창립 기념식을 가졌을 때였다.

직원 3명과 20평 남짓한 사무실에서 출발하여 현재의 삼성동 사무실로 확

대 이전한 것을 축하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프랑스 바

이어는 2백여명의 참석자들에게 “강은수 사장의 페어 플레이 정신”을

칭찬한 것과 방글라데시 생산공장을 대표해서 참석한 현지 생산과장이 “

당신이 얼마나 많은 굶주린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는지 아느냐? 너

무 고맙게 생각한다.”는 감사의 인사를 전해들으며 강은수 사장은 사업

가로서 큰 보람을 느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를 기쁘게 했던 것은 유로모드의 직원들이 회사에 대

한 애착을 강하게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대학 졸업 후 무역회사에서 머천다이저로 일하다가 독립한 것이 그의 나

이 30살 때였다. 거래를 트기 위해 업체를 방문하면 아무도 그를 ‘사장

’으로 부르지도, 대우해 주지도 않았다. ‘미스 강’,‘미세스 강’이란

호칭이 대부분이었고 그나마 조금 예우해 주는 곳조차 ‘강전무’가 다였

다.

증저가 의류로 불황타개 아동복제조업 하던 모친 영향

“제가 그때 상대한 사람들이 모두 남자들인데다가 나이도 거의 비슷했

죠. 아마 자기들은 월급쟁이인데 그 나이에 저는 사장 소리 들으니까 상

대적인 열등감을 느꼈나봐요. 의도적으로 인정을 안하려는 눈치였어요. 물

건에 결함이 있어도 절대로 먼저 사과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죠. 일이 힘

든 것이 아니라 업무 외적인 것이 더 스트레스가 쌓이더군요. 근데 그런

어려움도 잠깐이었어요. 매출이 차츰 늘어가니까 관계가 많이 바뀌었어요.

이제는 깎듯하게 유로모드의 대표로서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동기생들이 대부분 작품활동을 하거나 인테리어, 디자인 쪽에서 활동한

반면 강은수씨는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다. 이런 그의 사업가 기질은 모

친에게서 물려받았다. 그의 어머니는 70년대 후반 브랜드를 가지고 아동

복 제조업을 크게 했다. “사업을 시작하고 보니 각종 봉제용어가 친숙하

게 느껴지더라”고 강은수씨는 말한다.

서통산업 섬유수출부에 근무하던 당시의 남편과 만나 결혼, 현재 10살난

아들을 두고 있는 강은수씨는 4년 전 제조무역업체인 유라시아를 설립하

여 니트 의류 일부를 직접 생산해 수출하고 있다.

<박정 희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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