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뒤꿈치를 내려놓는다. 발바닥이 바닥과 맞닿는다. 엄지발가락으로 바닥을 힘껏 밀어낸다. 움츠려 있던 허리에 의식을 집중해서 바로 세운다. 팔은 자연스럽게 흔든다. 다시 다른 쪽 발을 내딛는다. 볼을 스치는 한줄기 바람, 더 가깝게 느껴지는 하늘.
카메라 들고 두근대는 마음으로 운동화 끈 고쳐 맨다. 발걸음이 가볍다. 고요하고 눈부신 아침 산책. 시끌벅적해지는 소리는 산책을 마치고 사무실로 가야 하는 신호다. 내가 좋은 날은 남에게도 좋은 날. 학생들 소풍철이다. 벚꽃 잎 수만큼, 흐드러지게 하얀 꽃만큼 환하게 웃다 가라.
여름
마음 설레게 하던 연둣빛이 어느새 이렇게 진초록이 됐을까. 한 달 후, 일 년 후 나는 얼마만큼 짙어져 있을까. 아이쿠, 햇볕 뜨거워지기 전에 얼른 들어가야지.
가을
노란 은행잎 위에 빨간 단풍잎이 점점이 살짝 오그라든 모습도 너무 귀여워. 세수하고 물기 닦지 않은 것처럼 아침이슬이 초로롱한데 때마침 각도 잘 맞춰준 햇살이 환하게 비춰주니 반짝반짝 배시시 웃어주며 경이롭고 황홀하게 내 아침을 맞이해준다. 깜짝 놀라서 한참을 바라보고 웃다가 지나치기 아쉬워 계속 돌아다본다.
봄은 주변에서부터 시작되지만 가을은 위에서부터 내려와 주변에서 끝이 난다. 이곳 저곳 둘러보아도 참 예쁘다 아름답다 쓸쓸하다 느끼는 걸 보면 이제 가을도 막바지인가 보다.
이젠 고운 색들은 거의 다 떨어져 내렸고 하얗게 눈 내려앉은 위에 햇살이 사르륵 비춰주는 그 모습에 반해 즐겁게 발걸음을 옮긴다.
딱 햇살 비친 곳만 녹아서 이슬이슬 반짝이고 나무 그늘에 가려진 곳은 그대로 하얗게 숨 쉬고 있다. 신비롭다 재밌다 참 예쁘다 늘 아침이면 좋겠다. 나도 햇살에 좀 내놔봐야겠다. 어루만져 달라고. 사무실 거울 앞에 서면 양 볼과 코끝이 빨개진 채 기분 좋게 웃는 내가 있다.
내가 일하고 있는 ‘푸른내일을 여는 여성들’은 경기도 과천에 있다. 과천은 걷기 좋은 길이 참 많다. 앉아서 일하는 시간이 많아져서 다이어트의 필요성을 느낀 후 어떤 운동이 가장 좋을까 고민했다. 헬스장은 공기가 좋지 않을 것 같고 비용을 많이 들이는 것도 썩 맘에 들지 않고 줄넘기나 달리기는 몇 번 하다가 그만둘 것 같고 요가학원은 이 약속 저 약속 핑계로 잘 빠질 것 같고 변명거리들이 난무하는 중에 선택은 어렵기만 했다.
그래서 시작하게 된 것이 출근길에 두 정거장 먼저 내려서 걷기였다. 힘들지 않고 부지런해질 수 있어서 더 좋고. 게다가 과천은 서울대공원이라는 좋은 곳이 있지 않은가. 처음에는 대공원역에서 사무실까지의 길만 걸었다. 봄이 되어 벚꽃을 보겠다고 한 시간 더 일찍 나서서 호수 길을 한 바퀴 돌았다. 한적한 곳을 혼자서 한껏 느낄 수 있음에 너무너무 황홀했다. 그 경험으로 대공원 호수 길도 한 바퀴 돌아서 사무실로 가는 긴 코스가 생겼다. 한번 두번 횟수가 쌓이다 보니 무겁던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꽤나 자주 걸었다. 걷지 않았다면 하늘의 변화와 나무의 변화를 느낄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걷기를 처음 시작할 때는 몸이 풀리지 않아 발걸음에만 집중하게 되지만 어느 순간 걷다 보면 주변 경치를 둘러보며 기분이 좋아진 나를 만날 수 있었다. 한숨 나오는 일을 떠올리다가 ‘지나갈 거야’ 하고 타이를 수 있었고, 멋진 문구가 떠올라 일기장을 장식할 수 있었고, 세상사에 지쳐가는 나를 달랠 수 있었다. 움직이는 수단 중에 가장 느리고도 정직한 걷기가 나를 만나는 데 가장 멋진 방법이었던 것이다.
사색과 함께 느리게 걷기. 그저 행복해지는 한 방법. 오늘도 출근길을 소풍 길로 만들어 나는 걷는다.